[천자칼럼] 국가 호명순서
2019년 12월 중국 청두에서 8차 회의가 열린 이후 중단 상태인 동북아시아 3국 최고위 협의체의 한국 측 공식 명칭은 ‘한·일·중 정상회의’다. 언론에서는 대체로 ‘한·중·일’로 썼지만 정부 차원에서는 ‘한·일·중’으로 표기했다. 한국을 앞세우는 것은 당연한데 일종의 고유명사처럼 굳어진 ‘한·중·일’의 순서를 깬 것은 정상회의 개최 순번에 따라 표기한다는 방침 때문이다. 3국 정상회의는 2009년 베이징, 2010년 제주도에서 열려 일본-중국-한국 순으로 의장국(개최국)을 맡는 관행이 정착됐다. 그래서 일본도 ‘일·중·한’으로 표기했으나 중국은 ‘중·한·일’이 아니라 ‘중·일·한’으로 쓰고 있다. 한국을 얕보는 심리가 깔려 있는 것이다.

외교관계와 국제회의 명칭 등에서 국가 이름을 나열하는 순서는 자국과의 친소(親疏)·은원(恩怨) 관계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동맹인 미국은 당연히 1순위지만 다른 나라들은 관계가 좀 복잡하다. 일본은 자유민주체제의 일원이지만 식민지배의 구원에다 역사 왜곡,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편치 않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지만 6·25전쟁 땐 적이었고, 지금도 ‘주적’인 북한과 같은 편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헌법상 대한민국 영토이고, 북한 주민도 국민이라는 점에서 ‘순서 특혜’를 받아왔다. 북미·북일·북러 등으로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젠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잇단 국가명 순서 파괴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윤 대통령은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8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북한과 러시아를 ‘러시아-북한’ 순으로 부르면서 이들의 군사거래 위험성을 엄중 경고했다. 핵과 미사일로 끝없이 한국을 위협하는 북한을 무조건 1순위로 배려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로 남한을 부르면서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는 마당이다. 윤 대통령은 이달 초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동북아 3국을 ‘한·일·중’으로 불렀다가 귀국 후 국무회의에서는 ‘한·중·일’로 불렀다. 필요에 따라 순서를 바꾸면서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발신하는 모양새다. “호명 순서에 큰 의미는 없다”는 외교부 관계자의 설명은 그야말로 외교적 수사일 뿐이다.

서화동 논설위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