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사진)이 다음 달 중동지역을 순방할 때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할 예정이다. 지난해 1월 취임 후 줄곧 냉랭한 관계를 해소하려는 모양새다. 미국 휘발윳값이 사상 최초로 갤런당 5달러를 돌파하자 공급량 증대를 요청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12일(현지시간) 악시오스 등 외신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다음 달 14~15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이어 사우디를 방문할 계획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처음으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만날 예정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도했다. 사우디를 비롯해 바레인 이집트 요르단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UAE) 등의 지도자와도 잇달아 만난다.

이는 11월 치러질 중간선거를 염두에 둔 행보로 풀이된다. 지난 11일 미국 휘발윳값은 사상 최초로 갤런(약 3.8ℓ)당 5달러를 넘어섰다. 물가 상승이 선거 전 최대 이슈로 떠오르자 휘발윳값 상승을 억제하러 나선 것.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수장 격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는 설명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40년대부터 미국의 오랜 우방이었다. 하지만 2018년 사우디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으로 인해 양국 관계가 경색됐다. 빈 살만 왕세자가 암살 배후로 지목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사우디를 겨냥해 “대가를 치르도록 하고, 왕따 신세(pariah)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지난해 2월 사우디에 미국 무기 수출을 금지했다. 이제껏 사우디 순방도 자제했다. 실질적인 정부 수반인 빈 살만 왕세자(사진)를 ‘패싱’하고 그의 부친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과 통화했다. 이미 압둘아지즈 국왕은 건강을 이유로 왕세자에게 실권을 넘겨준 상태였다.

휘발윳값에 외교 정책이 전환됐다. 인플레이션(지속적 물가상승)의 요인이 에너지 가격으로 지목돼서다. 치솟는 물가에 지지율은 하락하는 중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줄곧 OPEC에 원유 증산을 요구했지만 사우디는 호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가 참여한 OPEC+ 합의를 고수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자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했다는 설명이다.

앞서 사우디아라비아는 한 차례 미국의 요구를 거절한 바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해 9월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이 빈 살만 왕세자를 접견했을 때 회담 분위기가 파국에 가까웠다고 전했다. 빈 살만 왕세자가 설리번 보좌관에게 고성을 지르며 카슈끄지 사건을 논하고 싶지 않고, 석유 증산은 잊으라고 통보한 것이다.

빈 살만 왕세자 입장에선 러시아에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다. 카슈끄지 피살 사건 직후 2018년 12월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서 서방국가 정상들은 왕세자를 외면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만이 그에게 악수를 청하고 대화를 나눴다. 미국이 사우디를 따돌리는 가운데 러시아가 손을 내민 것. 그 결과 올해 3월부터 빈 살만 왕세자는 푸틴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과 잇따라 통화하며 러·중과 가까워지는 행보를 보였다.

사우디행 소식을 접한 미국 내 여론은 요동쳤다. 휘발윳값 때문에 인권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퇴행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또 지난 8~10일 치러진 미주정상회의에선 독재를 빌미로 베네수엘라 등 남미 3국을 배제해놓고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하는 게 이율배반이란 지적도 빗발쳤다. WSJ은 "인권을 중시해 온 바이든 대통령이 고유가 압박을 완화하려 사우디의 언론인 암살 사건을 덮으려는 모양새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고 지적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