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대선 후보들의 反혁신 정치 본색
“이것은 인간 활동이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지 처음으로 보여줬다. 경탄할 만한 예술을 창조해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수로, 고딕 성당과는 완전히 다른 기적이었다. 민족의 대이동, 십자군과는 차원이 다른 원정을 해낸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1848)에서 말한 이것은 자본주의다. “이것은 생산도구를 끊임없이 변혁하지 않으면, 생산관계와 더 나아가 사회관계 전반을 혁신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생산도구의 계속적인 변혁, 사회관계의 끊임없는 혁신이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별해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자본주의는 ‘변덕쟁이’라서 ‘자승자박’하고 말 필연적인 운명을 안고 있다는 주장만 빼면.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변화’의 한 방식(form) 내지 방법(method)”이라고 했다. 변화의 지속가능성 문제가 남지만, 자본주의가 변화를 계속해낼 수 있으면 굴러가는 것이고 변화를 더 이상 할 수 없으면 끝나는 것이다. 슘페터가 ‘내부로부터(from within)’ 경제 구조를 끊임없이 바꾸는 산업의 변화 과정, 즉 ‘창조적 파괴’가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한 이유다. 노동도 기업도 변화를 향해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도태당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전환을 내부로부터 경제 구조를 끊임없이 바꾸는 산업의 변화 과정, 즉 ‘창조적 파괴’로 본다면 어떤 선택이 요구되는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인데도 대선 후보들은 도피할 궁리만 하고 있다. ‘전국 단위 공공 택시 호출앱’(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정부 재정 투입 플랫폼’(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을 들고나오는 게 그렇다. 카카오모빌리티를 국가가 인수하자는 얘기까지 나올 판국이다. 당장 표라도 얻어보자는 심산이지만, 택시업계도 플랫폼 산업도 다 죽일 무모한 발상이다.

대선 후보들은 코로나19가 물꼬를 터준 원격의료, 의약품 배송 등을 어떻게 제도 개혁으로 이어갈지에는 침묵한다. 의사협회, 약사협회 눈치를 보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이재명’ ‘AI 윤석열’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딥페이크, 편향성에는 한없이 너그럽고 다른 쪽에는 적대적인 사람일수록 위험하다. 권력을 잡으면 공정이란 이름으로 규제의 칼날을 들이대며 혁신의 씨를 말리려 들 공산이 크다.

탄소중립·에너지 전환도 내부로부터 창조적 파괴를 요구한다. 기업으로서는 구조 전환에 승부를 걸든지, 탄소국경세를 피하려면 현지화라도 불사해야 할 판이다. 포스코가 지주사 체제를 도입하고 미래기술연구원을 설립하고 그 입지를 정하는 것은 기업의 선택이다. 포스코는 ‘국민기업’이 아니라 ‘민간기업’이다. 대선 후보들이 모두 뛰어들어 균형발전이란 번지수가 전혀 다른 황당한 논리를 들이대며 정치화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이 돼서 이런다면 기업 경영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제15조 위반이다. 기업이 살기 위해 나라 밖으로 나가겠다면 또 어딜 가냐고 비난할 정치다. 이도 저도 하지 말라면 그냥 앉아서 죽으란 소리와 진배없다. 그러다 기업이 존폐 위기에 직면하면 그땐 국민 혈세를 퍼부어 인수하자는 최후의 드라마가 펼쳐질 것이다. 정치가 기업과 산업을 망치고 투자와 일자리를 앗아가는 전형적인 수순이다.

기술과 지식, 아이디어가 혁신을 이끌어가는 세상이다. ‘친(親)노동이냐 친기업이냐’ 편 가르기 논쟁을 벌이는 것부터 시대착오적이다. 더 황당한 것은 자칭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정치인의 친노동·친기업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노동의 이동을 방해하는 노동시장의 낡은 규제는 반(反)노동이라고 해야 맞는다. 새로운 투자를 가로막는 진입·퇴출 규제는 그 자체로 반기업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로머가 강연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모두가 성장을 원하지만 아무도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끊임없이 변화를 도모해야 돌아간다. 국가 간 격차는 여기서 벌어진다. 변화에는 저항이 따른다. 수많은 실패도 생긴다. 그래서 혁신의 안전망을 깔자는 주장은 백번 옳지만, 이 나라 대선 후보들은 관심조차 없다. “차라리 혁신을 규제하는 게 낫다”는, 반혁신의 ‘정치 본색(本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