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참 많이 변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A, B, C를 어색하게 공책에 쓰면서 영어라는 외국어를 처음 접했던 세대들은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요즈음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배운 문장은 “I am Tom” 이었다. 지금 보면 너무 간단한 문장이었지만 1980년대 초반에 중학교를 다닌 학생들에게는 결코 쉬운 문장이 아니었다. 한 반에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읽는 아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르치는 선생님의 발음도 배우는 학생의 발음도 왠지 영어라는 외국어가 아닌 이상한 한국어처럼 들렸었다. 시험에 나오니까 무작정 외우기만 했던 영어 문장이었다. 말하면서 그 누구도 따지지 않는 1형식이니 2형식이니 하면서 달달 외웠던 기억이 새롭다.



조기 영어 교육으로 유치원에서부터 원어민을 통한 영어 수업을 해서인지 영어 발음이 완벽한 아이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되었다. 학습지 TV 광고에도 어린 아이가 나와서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오히려 영어를 못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영어로 자신의 소개 정도는 거뜬히 해내는 요즈음 아이들이다.



십여 년 전만해도 영어를 잘하면 직장에서 우대를 받았다. 우대를 받았다기보다는 기회가 많이 주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해외 출장의 기회도 남들보다 많이 얻을 수 있었고, 해외법인에 나가서 근무할 수도 있었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내는 사람은 승진도 빨랐고, 조직 내에서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는 부터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그런지 단순하게 영어를 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해외에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사람도 많아졌고, 글로벌 시대에 해외 교포가 한국 회사에 와서 근무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의 말을 통역하는 수준의 영어 정도면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설득하는 협상 언어로서의 영어 구사력을 더 높게 평가한다.


(한국시민자원봉사회에서 주최한 제 1회 청소년 UN 총회 안내서)


1월 15일 한국시민자원봉사회(www.civo.net)에서 주최한 제 1회 청소년 UN 총회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외교관을 꿈꾸는 학생들이 참가하는 대회였다. 각국의 대사직을 맡아 영어 실력뿐 만아니라 청중 앞에서 세련되게 말하는 것을 겨루어 보는 대회이기도 했다. 총회가 있기 두 달 전에 심사위원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바쁜 일이 생겨서 사양을 했으나 주최 측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외국생활을 7년간 한 바 있는 내가 적임자라고 간곡한 부탁을 사양할 수 없었다. 특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외국의 경제 사절단이나 해외 바이어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했던 나의 경험을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사의 공정성을 높이고 영어 구사력뿐 아니라 말할 때는 매너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하기 위해서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시는 교수님과 한국에서 오랫동안 한국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신 경험이 있는 원어민 선생님도 심사위원단으로 선정되었다. 머릿속에만 들어있는 영어가 아닌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은 후 글로 정리하고, 내 의견을 논리적으로 피력하며 설득하는 과정을 몸소 익혔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된 거 같다.


(1회 대회라서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참가한 학생들은 열심히 대회에 임했다.)


청소년 총회는 중등부와 고등부로 나뉘어 진행이 되었는데, 심사위원들에게는 항목별 점수를 매길 수 있는 심사표와 학생들의 원고가 미리 주어졌다. 첫 번째로 열리는 것이라서 대회 장소가 현란하게 꾸며지지는 않았지만, 참가하는 학생의 열기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어서 오히려 행사장은 소박하게 보였다. 행사장 뒤편에 앉아서 대회를 참관하는 학부모들의 표정은 아주 진지하기도 했고 대견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학생들은 자신이 선택한 나라의 대사 자격을 부여받은 후 UN 본부 국제회의장에서 수많은 UN 회원국의 외교관들 앞에서 미리 상정된 주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는 순간에 선 것이다. 미국, 일본, 중국 같은 강대국의 대사를 맡은 학생도 있었고, 몰디브 같은 작은 섬나라의 대사를 지원한 학생과 아프리카의 케냐나 남미의 브라질 같은 제 3세계 국가의 대사를 신청한 학생도 있었다. 각국의 대사 자격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최대한 유리한 발언을 하되, 잘 구성된 콘텐츠를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청소년 UN 총회 참가 학생이 발표한 원고)




대회가 시작되었다. 어떤 학생은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으로 발표해나갔지만 아무런 제스처 없이 원고만 바라보고 말했고, 다른 학생은 원고의 내용은 너무 좋은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청중들이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또한, 발표가 끝나기가 무섭게 연단에서 황급히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전부 다 감점 요소가 되었다. 발표는 시작과 마무리가 다 좋아야 한다. 시작은 좋았는데 마무리할 때의 태도가 좋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청중들의 시선은 외면한 채 원고만 바라보거나 천장을 보고 말한다면 청중들의 집중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진실성도 떨어져 보인다. 발표할 때의 시선처리는 아주 중요한 요소인데 참석한 청중들에게 시선을 골고루 배분하는 것이 좋다.



특히 가장 나쁜 습관은 너무 긴장한 탓에 특정 신체 부위를 무의식적으로 만지거나 단어를 잘못 발음한 후에 혀를 내미는 등의 습관인데, 중요한 것은 청중은 그런 태도를 절대로 애교로 봐주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 태도가 반복되면 청중은 말하는 사람을 연습이 부족한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다. 협상에 임할 때는 아무리 단어를 많이 알고 발음이 좋아도 논리적인 요소가 결핍되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특히,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의 시선처리, 목소리의 높낮이, 적절한 제스처, 말을 끝내고 곧바로 퇴장하는 것이 아닌 잠시 청중을 바라다보는 여유를 갖는 것 등은 아주 중요한 심사요소다.

(청소년 UN 총회 참가 학생들)


청중을 설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 두 가지는 문장의 길이와 악센트다. 긴 문장보다는 간단명료한 문장이 좋다. 학생들 중에는 긴 문장을 구사하다보니 스스로 어느 시점에서 문장을 끊어 읽어야 할지를 놓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짧은 문장으로 나누어서 쓰게 되면 이런 문제는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긴 문장은 절대로 좋지 않다. 긴 문장은 이해하기도 어렵다. 동시에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단어는 보다 크게 말해야 한다. 가령 “I went Kenya for two weeks” 문장이 있다고 하자. 갔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면 ‘went’를 강하게 읽어야 하고, 많은 국가 중에서 Kenya 라는 나라에 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면 당연히 ‘Kenya’ 에 악센트를 주며 크게 읽어야 한다. 내가 얼마동안 있었다는 기간을 강조하려면 ‘two week’를 강하게 읽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심사위원들이 항목별로 채점을 매긴다.)




언어구사력 뿐만 아니라 발표자의 태도가 심사하는 과정에서 순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말할 때의 태도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몸에 배인 습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습관의 경우 남이 적적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깨닫기 힘들뿐 만아니라 고치기도 힘들다. 특히, 한나라를 대표해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보기 어색한 제스처를 반복한다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발표했다고 하더라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없게 된다. 세련된 말투와 청중을 매료시키는 목소리 톤과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그리고 적절하게 나오는 제스처는 외교관이 갖추어야 하는 요소 중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입상한 학생에게 시상을 하고 나서 기념 촬영)


시험을 치루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아직 많은 것이 현실이지만 자신이 꿈꾸는 직업으로서의 외교관이 되기 위해 영어뿐만 아니라 세련되게 말하는 법을 연습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사실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청소년 UN 총회 참가를 준비하면서 또한 대회에 직접 참가하여 자신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연습을 게을리 하니 않은 학생들은 외교관이 되는 길에 벌써 한발자국 앞서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참석한 모든 학생들이 대견스러웠다. 심사위원의 심사평과 시상식을 마친 후, 대회에 참가했던 모든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다. “외교관이 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

– 이글은 본인이 2월 25일 교과부 블로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