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과격함과 피해 강조 사진 대다수…설명은 '왜곡·편집'
39년만에 공개된 5·18사진첩…'시민을 폭도'로 몰아간 군부
5·18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령부가 당시 생산한 사진첩에는 시위대를 폭도로 몰아가려는 군부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사진은 군 관계자가 직접 촬영하거나 기자들의 사진을 압수한 것으로, 주로 시위대의 과격함과 시위로 인한 피해 상황을 강조할 수 있는 사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부 시민군이 군용 차량을 확보했던 아세아자동차의 경우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컬러 사진으로 피해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또 일반 차량이 부서진 모습을 대파(大破)와 소파(小破)로 나눠 구분하고 차량에 불이 나고 있거나 차량을 이용해 시위하고 있는 사진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특히 버스를 계엄군에게 돌진하는 모습이나 광주 KBS, 광주세무서 방화 모습 등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장면까지 사진첩에 담겨있다.

39년만에 공개된 5·18사진첩…'시민을 폭도'로 몰아간 군부
또 시위대가 가지고 있는 총기류 등을 강조했다.

시위대가 장갑차를 몰고 다니거나 총기를 들고 있는 사진에는 '탈취' '폭도' '난동' 등의 단어를 사용한 설명을 붙여놓았다.

일부 사진에선 시위대 얼굴에 붉은 동그라미를 쳐 놓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 이라거나 '극렬 행동을 하는 인물'이라는 등의 표시도 했다.

5·18기념재단 조진태 상임이사는 "사진을 보니 차량과 트럭 파손, 장갑차 운행 등 계엄군이 무력 진압을 명분 삼기 위한 사진들이 꽤 많이 보인다"고 말했다.

시위대로 인한 피해 상황을 강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실을 왜곡했던 당시의 상황도 사진첩에 들어있다.

사진첩에 포함된 '정훈활동일지'에는 시위대가 기물을 파손하고 자가용에 방화를 일삼으며 난동이 극대화하고 있다고 적었다.

특히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서 일시 철수했던 다음 날(5월 22일) 살인과 약탈 등 광주 시내는 완전 무법지대가 됐다고 왜곡했다.

하지만 이 기간 광주에서는 단 한건의 강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완전 공동체 사회'였다고 당시 경험자들은 입을 모은다.

사망한 계엄군의 사진에 마치 시위대에 의해 사망한 것인 양 설명을 붙여놓거나, 계엄군에 의해 시위대가 사망한 것을 '선동'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39년만에 공개된 5·18사진첩…'시민을 폭도'로 몰아간 군부
사진첩에는 군 관계자가 직접 찍을 수 없는 사진도 포함돼 있어 '편의대(사복을 입고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특수공작부대)'가 사진을 찍은 것 아니냐는 의심도 제기된다.

조 상임이사는 "복면을 쓴 시민군을 정면으로 찍은 것이나 시위대가 도청을 점거했을 때 도청 안쪽에서 찍은 사진 등은 보안사가 찍기 어려운 것"이라며 "편의대를 운영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최종진압 작전이 벌어진 5월 27일 이후엔 군이 시가지를 정리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담겼다.

다음날인 28일에는 장갑차와 지프를 몰고 금남로를 무력시위 하는 사진도 실었다.

계엄군이 '폭동'을 진압하고 '평화와 안정'을 지켜냈다는 메시지 등을 담으려 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반해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 장면이나 총격으로 사망한 시위대 등의 사진은 사진첩에 담기지 않았다.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을 계기로 다시 논란이 된 헬기 사격에 대해서도 단서를 찾을 만한 사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시위대가 쏜 총탄에 맞았다며 총알 흔적이 난 헬기 근접 사진을 실었다.

사진첩 첫 장에 '광주사태 진압 주요 지휘관'으로 소준열 전남계엄분소장, 출동부대 지휘관으로 박준병 20사단장, 최세창 3공수, 신우식 7공수, 최웅 11공수 여단장의 사진을 실었다.

이는 계엄 상황에서 정상적인 지휘 계통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읽힌다.

조 상임이사는 "5월 항쟁을 폭동으로 조작하기 위해 핵심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보안사였다"며 "이 사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진상 규명에는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39년만에 공개된 5·18사진첩…'시민을 폭도'로 몰아간 군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