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설계 시장에서도 오픈소스 바람이 불고 있다. 반도체 핵심 기술인 설계자산(IP)을 공개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수정할 수 있는 개방형 체제 ‘리스크파이브(RISC-V)’가 영역을 확장하면서 주목받는다.

리스크파이브 체제를 주도하고 있는 반도체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싸이파이브(SiFive)는 최근 한국지사를 별도 법인인 세미파이브(SemiFive)로 독립시켰다. 조명현 세미파이브 대표는 14일 “한국의 우수한 반도체 설계 인프라와 연합해 ‘커스텀(맞춤형) 반도체의 새로운 글로벌 허브’가 되겠다”고 말했다.
반도체 설계에도 오픈소스 바람 분다
한국계가 참여한 개방형 오픈소스

리스크파이브는 한국인 이윤섭 씨를 포함해 미국 UC버클리 학자 세 명이 주축이 돼 2010년 개발한 개방형 반도체 IP 시스템이다. 이들은 반도체 스타트업 싸이파이브를 창립해 리스크파이브 기술의 상용화와 저변 확대를 주도하고 있다.

리스크파이브는 IP가 공개돼 있다. 누구든 홈페이지에 공개된 IP 코드를 이용하거나 수정해 반도체 칩을 설계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반도체 설계 시장을 독점한 영국의 ARM 체제는 김치 레시피를 독점해 이를 이용할 때마다 이용료를 받는 방식이다. 양념을 입맛에 따라 수정할 수 없고, 그 레시피대로 만든 김치를 제3자가 판매할 수도 없다.

반면 리스크파이브는 김치 레시피를 무료로 공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비자들이 그 레시피대로 양념을 만들어 스스로 김치를 담가 먹어도 되고, 입맛에 따라 마늘, 고춧가루 비율 등을 바꿔 만든 김치를 팔 수도 있다. 라이선스료와 특허 로열티를 낼 필요가 없어 비용이 크게 줄어들고 제작 기간도 단축된다.

싸이파이브는 오픈소스인 리스크파이브를 적용하면서도 고객사가 직접 만들 때보다 더 싸고 빠르게 맞춤형 반도체 IP를 판매해 수익을 얻는다.

조 대표는 “싸이파이브 홈페이지에서 필요한 옵션을 클릭해 주문을 넣으면 맞춤형 반도체 중앙처리장치(CPU)를 하루 만에 제공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칩 완성까지는 약 3개월이 걸린다. 한국지사에서 별도 법인으로 승격한 세미파이브는 반도체 IP를 넘어 반도체 칩 자체를 더 쉽고 빠르게 만드는 플랫폼으로 성장한다는 계획이다.

그동안 반도체 시장에서는 오픈소스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오픈리스크, 오픈코어스 등 반도체 IP를 공개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기존 독점체제에서 시장을 형성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최근 반도체업계가 오픈소스에 주목하는 것은 정보통신기술(ICT)산업의 중심이 사물인터넷(IoT)으로 옮겨가면서다. IP는 반도체 기능 설계 단위로 ‘반도체의 심장’으로 불린다.

PC용은 인텔, 모바일 기기용은 소프트뱅크가 인수한 ARM이 주도하고 있다. 반도체를 설계·개발하는 팹리스 업체가 이들의 IP에 핵심 기능을 더해 실제 반도체 칩을 만든다.

통상 자율주행차 등 IoT의 기반이 되는 반도체를 만드는 데 최소 100억원,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발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IT업계에서는 맞춤형 반도체 개발 비용이 높은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현해야 하는데 제작시간도 너무 길다.

“저평가받던 한국 업체에 기회”

리스크파이브 체제를 공유하고 지원하는 리스크파이브재단에는 현재 250여 회원이 있다. 이 가운데 기업 회원은 삼성, 퀄컴 등 120여 개사다. ARM과 인텔을 제외한 주요 반도체 기업은 거의 모두 가입했다. 오픈소스의 원조 격인 리눅스와도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특히 중국 시장의 관심이 뜨겁다. ARM이 미국의 화웨이 제재에 동참하면서 대체재가 절실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리스크파이브재단에는 알리바바, 화웨이, ICT, 화미 등 중국 기업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리스크파이브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커지면서 ARM의 독주에도 제동이 걸리는 모양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8일 ARM의 IoT 관련 판매가 지난 5년간 정체 상태라고 지적했다. 또 ARM을 적용한 제3자 소프트웨어 개발자 수 역시 최근 6개월 동안 제자리걸음 중이라고 보도했다.

IoT 시대에 다양해진 반도체업계의 수요와 IoT용 반도체에 주력하는 리스크파이브의 부상이 맞물리면서 200조원 규모의 반도체 IP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조 대표는 “한국 반도체업계는 최고 수준의 설계 역량을 갖추고도 기존 IP 독점 체제에서 부당하게 저평가받은 측면이 있다”며 “한국 팹리스업계가 우리 플랫폼을 통해 반도체 칩 개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면 퀄컴, 엔비디아, 모빌아이 등을 뛰어넘는 성공사례가 나올 수 있다”고 기대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