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 보석 봉화이야기
아름다운 전통문화유적지 (1)
닭실마을의 청암정, 충재박물관, 석천정사
봉화의 전통마을로 유명한 닭실마을은 푸른 논과 인삼밭 너머로 기와집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충재 권벌이 일가를 이루고 그의 후손들이 500여 년간 집성촌을 일구고 살아온 터다. 풍수지리상 금닭이 알을 품은 모양의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닭실마을이라 부른다. 이 지역 최고의 명당으로 여긴다. 깊은 산이 감싸고 맑은 물이 흐르는 닭실마을은 봉화8경 중 3경이자 명승으로 지정된 청암정, 석천정사를 품고 있어 마을 자체가 하나의 문화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재 권벌의 종택 옆에 있는 청암정은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마치 섬처럼 떠 있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자를 빙 둘러 물이 흐르고 울타리를 친 듯한 무성한 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바위에 지어진 정자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원래 청암정 둘레에 연못이 없었고, 정자에 온돌방이 있었다고 한다. 온돌방에 불을 넣으면 바위가 소리를 내어 우는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한 스님이 바위를 거북이라 여기고 방에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 등에 불을 놓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궁이를 막고 바위 주변을 파내 못을 만들어 바위 거북에 물을 주었더니 더이상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정자 안에 걸려 있는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새긴 편액은 조선 후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었던 학자 미수 허목이 쓴 글씨다. 기품이 흐르는 청암정의 아름다운 풍광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 있다.
청암정을 나서면 바로 옆에 충재 권벌의 충재일기, 근사록, 고문서, 유묵 등 보물과 482점의 유물이 소장된 충재박물관이 있다.
청암정에서 물길을 따라가면 소나무 숲속 맑은 계곡에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충재의 큰아들 청암 권동보가 충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석천계곡에 지은 석천정사는 마치 자연과 함께 태어난 것 같다. 자연과 건축물이 하나인 듯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나무 중에서 으뜸으로 여기는 춘양목으로 지은 석천정사는 단정하다. 빼어난 풍광 속에 묻히지 않고 당찬 선비의 기상이 풍긴다.
바래미전통마을의 해저만회고택, 남호구택
봉화읍 해저리 바래미전통마을은 지상보다 낮은 바다였다는 뜻으로 ‘바래미’라 부른다. 바다 밑이라고 해서 ‘해저’라고도 한다. 1960년대까지 논과 웅덩이에서 조개가 나왔다고 한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실학사상을 가르치던 학록서당과 멀리까지 소문난 커다란 샘이 있다. 오래된 고택들이 모여 있는 전통마을은 무엇보다도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이 살아 있다.
해저만회고택은 조선 순조 30년(1830)에 문과에 급제해 현풍현감, 김해부사를 거쳐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냈던 만회 김건수가 살던 집이다. 고택은 바래미마을의 뒷동산이 감싸고 있는 남향집이다. 고택 안채는 만회의 6대조가 사들였고, 사랑채인 명월루(明月樓)는 만회가 직접 지었다.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명월루 누마루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마을 풍경을 바라보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만회고택의 자랑은 예술작품 같은 한옥뿐만이 아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심산 김창숙 선생 등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작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
해저리 한가운데에 있는 남호구택은 농산 김난영이 조선 고종 13년(1876)에 건립했고, 그의 아들 남호 김뢰식이 살던 곳이다. 집의 이름은 대부분 건립자의 호를 따서 짓기 마련인데, 남호구택은 특이하게도 아들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그런 데는 이유가 있을 터. 남호는 경상도에서 명망 높은 부자였다. 어느 날 상하이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 재산이었던 농사짓던 땅을 모조리 저당 잡혀 군자금을 마련했다. 해방 후 가세는 기울었지만 1977년에 건국 훈장을 받았다. 남호구택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된 ㅁ자형 건물이다. 나무가 좋기로 유명한 봉화의 고급 목재로 지어져 100년이 넘은 고택인데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황전전통마을의 거촌리 쌍벽당과 도암정
바래미전통마을에서 내성천을 건너면 황전전통마을이 나온다. 마을 앞산에 황학이 떼를 지어 살았는데, 황학들이 마을 밭에 내려와 앉으면 들판이 온통 누렇게 물든 것 같아 황전이라 불렀다고 한다. 거촌리 쌍벽당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 쌍벽당 김언구가 살던 곳에 그의 덕을 기려 명종 21년(1566)에 세운 정자다. 쌍벽당과 함께 있는 ‘ㅁ자형’ 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 있다. 부친인 죽헌 김균이 1450년에 지었다.
고택은 마을 뒷산 기슭에 경사진 지형에 지어져 대문채는 낮은 곳에, 본채는 높은 곳에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바라보인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에 넓은 육간대청이 있는 안채가 있다. ‘ㅁ자형’ 살림집으로 몸채가 유난히 크다. 안채 오른쪽에 별당인 쌍벽당이 있다. 뒤쪽 언덕에는 흙과 돌로 담장을 두른 사당이 있다.
전통마을의 또 다른 정자, 마치 연꽃 위에 떠 있는 듯한 도암정은 조선 효종 때 문신인 황파 김종걸이 1650년에 세운 정자다. 고색창연한 정자에서 당대의 유림이 교류하고, 세상사에 대한 공론을 펼치며 시를 읊었다. 아름드리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연등이 불을 켠 듯 화사한 꽃들이 피어있는 도암정의 풍경은 정자가 가장 많기로 유명한 봉화에서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답다.
상운면 워낭소리 촬영지
상운면 하눌리에는 가슴 뭉클한 영화 <워낭소리>의 촬영지가 있다. 평범한 농촌 마을은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팔순 농부, 최원균 할아버지와 마흔 살 소, 누렁이의 40년 우정을 기리기 위해 공원으로 조성됐다.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인데, 최노인의 친구이자 일꾼이었던 누렁이의 나이는 무려 마흔 살이나 됐다. 최노인은 누렁이와 함께 부지런히 논을 갈고, 밭을 맸다. 늙은 소는 노인을 위해 힘겨운 걸음으로 달구지를 끌었고, 최노인은 누렁이를 위해 꼴을 벴다. 누렁이가 더 이상 달구지를 끌 수 없을 만큼 수명이 다했다는 것을 알아챈 할아버지는 달구지에서 내려 절뚝절뚝 걸었다. 누렁이의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할아버지는 평생 소를 옭아매었던 코뚜레와 워낭을 풀어주었다. 3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교감한 최노인과 누렁이의 삶이 담긴 마을 한쪽에는 그 둘을 기리는 묘와 묘비가 새겨져 있다.
봉화=글·사진 이솔 여행작가 leesoltou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