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트래비스 칼라닉 우버 창업자가 한국을 찾았다. 설립 4년째를 맞은 우버가 비영어권 국가 중 첫 해외 진출 국가로 한국을 낙점하고 시장조사를 위해 내한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 택시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우버를 금지하라’며 집단행동으로 정부와 서울시를 압박했다. 결국 검찰이 우버를 기소했고 공유차량 서비스 시도는 그렇게 무산됐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는 1년 전 설립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두 곳이 1차 투자 유치를 막 끝마쳤다. 지금은 각각 중국과 동남아시아 차량공유 부문 1위 업체로 성장한 중국의 디디추싱, 싱가포르의 그랩이 그 주인공이다.

비슷한 상황은 핀테크(금융기술) 분야에서도 나타났다. 2010년대 초반 중국에서는 핀테크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루닷컴 투안다이왕 등 수많은 신생 벤처기업이 생겨나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반면 한국은 규제 강도를 더 높였다. 2013년 산업자본의 은행 지분 보유 한도를 9%에서 4%로 낮추는 내용의 금융지주회사법·은행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미래 산업에 대한 양국 정부의 인식차를 반영하듯 2013년 중국은 1만 명당 창업 기업 수에서 처음으로 한국을 앞질렀다. 중국 신생 기업들은 빠르게 성장했다. 미국 조사기관인 CB인사이트에 따르면 디디추싱, 샤오미, 루닷컴 등 중국의 10년 미만 신생 기업 20개의 기업 가치가 255조원으로 최근 한국 주요 벤처기업 가치의 총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코스닥 상장기업 전체 시가총액(252조원)을 넘어섰다.
 그래픽=허라미 기자 rami@hankyung.com
그래픽=허라미 기자 rami@hankyung.com
벤처 20년…몸은 커졌지만 체질은 허약

한국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벤처기업 확인제도를 도입해 벤처·창업 육성에 나선 지 올해로 20년이 됐다. 하지만 한국의 벤처산업은 여전히 규제 일변도의 반시장주의와 보조금 중심의 정부 주도 육성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주훈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정보센터 소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스타트업들은 거친 바다에서 적자생존 과정을 거친 ‘자연산’인 반면 상당수의 한국 벤처기업은 가두리 양식장에서 먹이를 먹고 크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텔레매틱스(차량 무선인터넷)산업을 한국이 실기한 벤처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고 있다.

한국에선 1990년대 초반 대리운전 사업이 선보였고, 2000년대 정보기술(IT)과 맞물리면서 대리운전 관련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02년 세계 최초로 차량위치기반 서비스가 도입됐고, 2004년엔 기사 인적사항 전송 서비스가, 2007년에는 대리운전의 휴대폰 결제가 가능해졌다. 차량공유 서비스의 기반 기술 도입은 한국이 가장 빨랐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텔레매틱스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공유경제와 자율주행차산업의 물꼬가 터지는 동안 정작 대기업으로 성장한 국내 벤처기업은 한 곳도 없다.

벤처기업 관계자는 “2000년대에 수백 개의 텔레매틱스 업체가 앞다퉈 생겨나 벤처 인증을 받았다”며 “하지만 엄격한 도로교통, 개인정보 규제 속에서 절반 이상이 문을 닫았고 나머지는 사업 변화를 모색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허약 체질로 길러져 갈 곳을 못 찾은 벤처기업이 늘면서 눈먼 돈을 노린 한탕주의도 기승을 부렸다.

투자·회수부터 시장에 맡겨야

전문가들은 정부가 벤처를 지원하는 대신 각종 조건을 붙이거나 모호한 규제를 들이대는 방식의 지원 제도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벤처 투자를 정부가 주도하는 곳은 세계에서 사실상 한국이 유일하다.

공공부문 벤처 지원의 상징처럼 꼽히던 미국 중소기업투자회사(SBIC), 영국기업은행(BBB) 등 선진국의 중소기업 정책금융기관은 대부분 사회책임투자 등 일부 영역을 맡는 식으로 위상이 축소됐다. 한국 모태펀드의 모델이 됐던 이스라엘 요즈마펀드도 2005년 민간 펀드로 전환했다. 이들 국가의 중소기업 투자 펀드 중 정부 자금 비중은 10%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한국만 여전히 모태펀드, 산업은행 등 정책자금의 벤처펀드 출자 비중이 40~50%에 이르고 있다.

벤처투자 자금 회수 시장의 90%가량이 기업공개(IPO)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한국 벤처 투자의 고질적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미국과 중국 등에선 인수합병(M&A) 시장이 이를 대신한다. 미국의 경우 구글벤처스, 인텔캐피털 등 두 곳의 대기업 계열 벤처캐피털(CVC)이 2016년 이후 사들인 스타트업만 200곳이 넘는다. 국내 벤처기업계에서는 벤처기업·대기업 협업 강화와 벤처투자 시장 활성화를 위해 정부에 CVC의 국내 도입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여전히 금산분리 규제에 가로막혀 있다.

고경봉/성수영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