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어제 노동신문 등 매체를 동원해 미국을 향한 비난을 쏟아냈다. 핵실험장 폐기와 미군 유해 송환 등 ‘선의’를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이 제재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무도한 처사’라고 했다. 그러면서 ‘단계별 동시 비핵화 행동원칙’을 강조했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싱가포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미국이 우리의 우려를 불식시켜줄 용의를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만이 일방적으로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핵실험장 폐기, 미군 유해 송환을 내세워 종전선언과 제재 완화를 동시에 요구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비핵화 협상에 나서지 않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남북한 정상회담과 미·북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비핵화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오히려 핵물질을 지속적으로 생산해온 북한이 이런 요구를 한 것은 억지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유엔 보고서까지 제출된 마당이다. 핵실험장도 더 이상 쓸 수 없는 시설을 폐기했을 뿐이다.

이런 판에 우리 정부는 연내 종전선언 추진 의사를 거듭 밝히는 등 서두르는 분위기다. 개성공단 재가동 ‘군불’도 때고 있다. 유엔에 부분적인 대북 제재 면제까지 요청했다. 대북 제재에 앞장서야 할 한국의 이런 움직임이 국제사회에 어떻게 비칠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당장 미국은 개성공단 재가동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이 북한산으로 추정되는 석탄을 최소 다섯 차례 이상 수입한 것으로 드러나 파장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은 ARF에서 남북한, 미·북 외교장관 회담도 거부했다. 그럼에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이 외무상은 진중하고 내공이 깊은 분”이라고 치켜세웠다. 비핵화 조치를 강도 높게 요구해야 할 상황에서 이런 식의 태도는 북한을 더 오만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강도 높은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이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나오게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북한과 협상은 하되 미국 등 국제사회와 철통같은 공조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