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어버이주의'가 국가 개입 부른다
사회주의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범위를 확대하는 이념이다. 위험스럽게도 이 사회주의가 한국의 경제·사회를 지배하는 주류 이념이 됐다. 정당 지지율에서 대표적인 좌익 정당(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의 지지율 합이 70%를 웃돌고 있다. 많은 한국인이 자유롭기도, 책임지기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한다는 증거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이 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가의 문제다. 이 문제에 주목하는 이유는 자유지식인의 역할 때문이다. 우선,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세 가지 논거를 보자. 첫째로 자본주의는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계획경제로 교체해야 한다는 관리사회주의다. 두 번째는 먹방(먹는 방송) 규제, 비만세처럼 스스로 건강도 돌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을 대신해 국가가 강제로 건강을 돌봐야 한다는 식의 온정주의다. 세 번째는 시장의 분배는 불평등하기 때문에 평등을 위해서 국가 개입을 늘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분배적 동기다.

이 세 가지 사회주의 지지 동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유와 책임을 싫어하는 심리학적 요인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한 것이 ‘어버이주의(parentalism)’다. 이는 시민들이 자신을 대신해 필요한 것을 정부가 해주기를 바라는 태도다. 이와 혼동하기 쉬운 게 온정주의다. 온정주의는 정부가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시민들에게 강제로 부과하는 엘리트적 태도다. 사회주의 지지 태도에서 온정주의는 하향식인 반면 어버이주의는 상향식이다.

시민들은 자신을 대신해서 국가가 선택하고 책임져주기 바란다. 국가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태도다. 이는 부모와 어린 자녀 간의 관계와 동일하다. 어린아이는 어버이 품에 안겨서 보호받을 때 아늑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면 붙들어주고 상처가 나면 치료해주고 행동이 지나쳐도 책임을 묻지 않고 흔쾌히 용서한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그렇게 해줄 걸 알기 때문에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확실하다고 해도 두려움 없이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어린아이가 성장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환경에 직면하면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일자리나 소득, 건강이나 노후도 불안해져서다. 자녀를 보육하고 교육시켜야 하는 책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대부분은 자유·책임·독립을 싫어하고 두려워한다. 인류는 그런 개념 없이 5만 세대 동안이나 살았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유와 독립을 싫어하는 이유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의지할 것을 찾는다. 한동안 성황당, 신령님, 종교 등 신(神)에 의지했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 니체의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망망대해에 버려진 것이다. 시장사회에 의지할 수도 없다. 시민종교로서의 자유주의는 한국 사회에 자리잡지 못했다. 자생적 질서도 낯설다. 자유, 독립도 어쩐지 생소하고 두렵다. 한국인이 의지할 유일한 곳은 국가뿐이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가 인기 있는 구호인 이유다.

신의 죽음과 국가의 탄생은 동전의 양면이다. 시민의 애환을 어루만져주는 정부가 좋다. 어린아이를 키워주고, 학교에 보내주고,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소득을 늘려주고, 병을 치료해주고, 늙으면 보살펴주는 등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기만 하면 자유는 희생돼도 좋다고 한다. 시민들이 국가로부터 안정감을 얻는 대가로 자유와 자립을 포기하고 싶은 동기에서 사회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독립보다 예속이 더 좋다는 뜻이다.

주목할 것은 자유지식인의 과제가 무엇인가의 문제다. 사회주의는 노예의 길이라는 걸, 사회주의에 의해 경제가 초토화된 베네수엘라를 보여주거나, 사회주의를 좋아하는 건 어린아이 같은 태도라고 비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자유지식인들의 과제는 자유주의를 ‘시민종교’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를 통해 시민들에게 어버이를 대신할 신도, 국가도 필요 없이 인간은 홀로 설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이 시민종교의 복음은 자유시장의 경쟁을 통해 제공되는 독립이라는 걸 충분히 가르쳐야 한다. 시장의 자생적 질서야말로 국가에 대한 광범위한 예속을 필요로 하는 사회주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심리적 안정을 제공한다는 것도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