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연말파티와 남장여자의 슬픔
연말 댄스파티에 참가하기 위해 남장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스포츠댄스를 처음 배울 때부터 여자에 비해 남자 수가 적었던지라, 키가 큰 필자가 쭉 남자 역할을 맡아온 탓이다. 평소와 달리 연말파티인 데다, ‘중급’반이 되고보니 스테이지에서 급에 준하는 실력도 선보여야 하고, 화려한 파티복의 여자 파트너들을 돋보이게 만들 의무가 생겨난 것이다.

성공적인 남장을 위해 거울 앞에서 남자의 매력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걷어보니, 그동안 긴 머리칼들이 얼굴의 단점을 얼마나 잘 가려주었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여성을 감추고 호리호리한 몸을 남성처럼 튼튼하게 보이려고 속옷을 두툼하게 껴입은 상태에서, 뽕이 들어간 흰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매고보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위장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술 주변에 수염을 달아보니 그것은 제법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여자 시계도 차는 법이 없으면서 가죽줄에 박힌 알파벳 디자인에 매혹돼 1년 전에 사둔 남성용 시계까지 찾아내 준비해 놓았다.

그 다음 남장여자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그리고 드라마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인 ‘십이야’, 그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쉬즈 더 맨(She’s The Man)’, 국내 역사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신윤복이 남장한 후 화원에 들어가는 ‘바람의 화원’과 그것을 소재로 영화로 만든 ‘미인도’가 있었다. 홍대 부근 필자의 아파트 길 건너편에 촬영 세트장이 있었던 ‘커피 프린스 1호점’이나 SBS 드라마 ‘아름다운 그대에게’도 있었고,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 읽었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호위하던 남장여자 오스칼도 매력적이었던 기억이 났다.

남장여자를 연구하면서 여자들이 남장을 해야만 했던 이유를 분석해 보았다. 필자의 경우는 부족한 남성성을 보충하기 위해서지만, 영화나 드라마 속의 여자들은 남성 위주의 세계에 들어가 남성들이 가진 것을 얻기 위해서였다. 여자의 외모로는 목표로 하는 것을 얻기 어렵기 때문인데, 가령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화원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축구부에서 좋아하는 축구를 계속하기 위해서 등이다.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거나 직업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장을 선택했던 것이다.

1년 이상이나 여자임을 봐온 사람들 앞에서 재미로 눈속임을 할 뿐 필자는 애초부터 들킨 경우라면, 드라마나 영화 속의 남장여자들은 여자임을 들켜서도 안 되고, 들키게 되면 겨우 얻은 것을 잃고 남성의 영역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그들은 암암리에 여성의 매력을 발산해서 이성에게 감정적 혼란을 야기하거나 본인마저 야릇한(!) 사랑에 빠지고마는 정해진 공식을 따라가고 있었다. 일이나 재능 대신 사랑을 얻게 되거나 그것조차 잃게 되는 것이 남장여자가 맞이하는 슬픔이었다.

파티 당일, 갑작스럽게 닥친 예기치 못한 일로 필자의 연말 댄스파티 참석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 여파로 남자 파트너들이 더 자주 춤을 추어야 했고, 게다가 한 묘령의 여자가 너무나 완벽하게 춤을 추다가 마지막 순간에 긴 머리 가발을 훌러덩 벗어제꼈는데, 자세히 보니 스포츠댄스 학원의 원장(남자)이 완벽하게 여장(女裝)을 한 것이어서 파티장이 웃음바다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쉽게 파티에 참석은 못했지만, 남장 해프닝은 요즘 우리 사회의 인기 문화코드인 남장여자(혹은 여장남자)가 설정해 가야 할 방향을 깨닫게 해주었다. 남자의 세계에 진입하거나 그들이 가진 것을 얻기 위해서 여성성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남성의 부족함을 채우거나 단조로운 삶의 유머나 반전으로 인간관계를 윤택하게 만드는 데 적절하게 사용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한편 대한민국 역사 이래 남성들의 독점이었던 대통령직을 위해 남장은커녕 ‘여성’임을 계속 강조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여성도 있음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김다은 <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daeun@chugye.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