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 재판정에 판사는 달랑 한 명뿐이다. 검사는 CCTV 화면을 짜깁기해 증거를 조작한다. 사립탐정처럼 사건 해결에 발벗고 나서는 사건브로커….'

아내 살해 용의자(한철민 · 장혁 분)을 두고 변호사(강성희 · 하정우 분)와 검사(안민호 · 박희순 분) 간에 펼쳐지는 치밀한 두뇌싸움을 다룬 법정스릴러 영화 '의뢰인'에 나오는 '옥에 티'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얘기다. 각색은 분명 영화의 특성이다. 하지만 왜곡이 지나치면 법조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또 다른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얼마 전 서울 명동CGV에서 '도가니'를 관람한 양승태 대법원장도 "영화가 고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재판 과정을 사실과 다르게 보여줌으로써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근거 없이 훼손된 점이 안타깝다"는 소감을 내놓기도 했다.

◆검사가 판사 접대하며 압력?

검찰 고위 간부가 사건 담당 판사와 사적으로 만나 술도 마시고 식사도 함께하면서 사건을 청탁하는 장면에 검사들은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재판의 독립은 헌법에 나오는데 헌법이 무너질 일"이라는 것.판사들도 "검사가 개인적으로 사건을 부탁하는 경우는 없다"고 못 박았다.

그렇지만 판 · 검사 간 유착이 정말 없을까.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작은 지청이나 지원 같은 곳은 1년에 서너번 정도 판 · 검사들이 전체 회식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판사들에게 기름을 쳐놓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구속영장을 발부해달라"고 검사들이 영장담당 판사에게 전화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의뢰인보다 브로커가 더 안달?

살해 용의자 한철민의 의뢰인답지 않은 태도도 특이하다. 보통 의뢰인이라면 자신의 무죄 입증 또는 형량 감경을 위해 유리한 증거를 열심히 변호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철민의 태도는 시큰둥하고,오히려 변호사와 브로커,사무장이 증거 수집을 위해 온몸을 던진다.

대형 로펌의 L변호사가 '부자로 보이지 않는 한철민이 도대체 착수금과 성공보수를 얼마나 건 거냐'란 의문을 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검사 출신인 P변호사는 의뢰인이 죄를 지었는지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면 아예 사건을 맡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때문인지 그는 아직도 2004년식 싼타페를 타고 다니고,버스로 출퇴근하며,마이너스 대출을 언제 갚을 수 있을지 고민 중이라 한다.

◆정황 증거뿐이지만 처벌해 달라?

안민호 검사는 배심원단을 향해 "정황 증거뿐이지만 정의감에 입각해 판단해달라"고 호소한다. "남편이 죽일지도 몰라"라고 딸이 말했다는 장모의 증언 등 간접 증거를 총동원했지만 살해용의자가 아내를 살해한 직접 증거 확보에는 실패했다.

물론 정황 증거만 있어도 기소할 수 있고,판례도 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검의 K부장검사는 "정황 증거밖에 없으면 기소해도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아예 기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살인은 사실이 인정되면 사형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엄격한 증거가 필요하다. 강도 살인 등 강력사건을 '증거법의 진수'라고 부르는 배경이다.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1995년),이태원 햄버거가게 살해사건(1997년)도 직접 증거가 없어서 줄줄이 무죄가 선고됐다.

K검사는 초임 때만 해도 간통현장이 발각되면 무조건 기소했다. 남녀가 분명히 호텔방에 있었고 종업원이 신음소리까지 들었다고 하는데 무슨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하냐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몇 번 무죄가 나면서 지금은 신중해졌다고 한다.

◆살인사건 재판을 단독판사가?

민사소송은 소송가액이 1억원을 초과할 땐 합의부,1억원 이하는 단독판사가 재판을 맡는다. 형사소송은 단독판사가 원칙이지만 법정형이 '사형,무기 또는 단기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해당하는 사건'은 합의부 사건이다.

법정형이 사형,무기,5년 이상 징역형인 살인 사건은 당연히 합의부 사건으로 부장판사 한 명과 배석판사 두 명이 재판정에 나와야 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판사석에 한 명밖에 보이지 않는다.

◆변호사가 의뢰인을 범인으로 잡는다?

변호사는 가능하면 의뢰인의 범죄를 감추려고 한다. 변호 도중 혹시 알게 된 비밀 누설은 변호사법 위반이다. 그런데 '의뢰인'에서 범인을 검거한 사람은 그를 변호한 강성희 변호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서울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강 변호사가 무죄선고 받은 피고인을 다시 만나 그의 진술을 녹취하고 테이프를 안 검사에게 전달하는 장면이 나온다"며 "이는 기존 변론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누설한 게 아니고 변호인-의뢰인 간 관계가 단절된 뒤 새로운 증거를 취득한 것"이라며 변호사법 위반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유능한 변호사 있을까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강 변호사가 의뢰인을 심문하면서 "당신이 죽이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며 극적인 반전을 꾀하는 장면.용의자의 회한의 눈물은 배심원의 동정심을 유도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이끌어 낸다. 강 변호사는 반대심문의 묘미도 보여준다. 자신의 딸이 사위에게 살해당했을 거라는 장모,검찰 쪽 증인으로 채택된 전직 경찰 등 상대편 증인들의 허점을 파고들어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배우 하정우는 외모도 훤칠한 데다 대법원 판례를 줄줄 욀 정도로 머리도 비상하다. 현실 세계에서,법조계에서 이렇게 뛰어난 변호사가 얼마나 될까.

김병일/이고운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