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善意),악의(惡意)라는 단어는 법전에 많이 등장한다. 법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익숙한 말이다. 다만 일반인이 아는 내용과 의미는 좀 다를 뿐이다. 법률상으로는 '좋은 뜻''나쁜 뜻'이 아니라 어떤 사실을 '몰랐다','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지난달 28일 일요일 오후 TV 등 언론에서 '선의'라는 말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 단어를 세 차례나 언급했다. 요지는 지난해 6 · 2선거 때 야권 후보단일화를 도운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할 수 없어 2억원을 줬는데 아무런 목적 없이 '좋은 뜻'에서 한 행위였다는 주장이다. 당장 아는 변호사들에게 전화를 돌렸더니 냉소적인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법을 떠나 상식적으로 2억원을 선의로 준다는 게 이해가 됩니까. "그래서인지 이날 이후 "선의로 ○○했다"는 패러디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혹시 곽 교육감이 선의를 언급하면서 '몰랐다'는 뜻도 담아 중의적으로 표현했는지 모르겠다. 측근들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곽 교육감은 양 선거캠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법한 '7억원 합의' 내용을 혼자서 몰랐다고 한다. 만일 곽 교육감이 7억원 합의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악의)에서 2억원을 지원했다면 대가성이 인정된다. 이 경우 '후보자 매수'라는 공직선거법상 범죄행위가 성립되기 때문에 몰랐던 척하는 것은 아닐까. 뒷돈 밀약을 대충 짐작은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원했다면 '미필적 고의'가 있는 것으로 간주돼 역시 처벌감이다. 아무튼 곽 교육감의 사법처리 여부는 검찰과 법원 몫으로 남겨두는 게 좋겠다. 하지만 곽 교육감이 장고 끝에 꺼내든 카드 '선의'가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 그 뿌리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곽 교육감은 "합법성만 강조하고 인정을 상실하면 몰인정한 사회가 된다"면서 "제가 배우고 가르친 법은 인정이 있는 법이자 도리에 맞는 법"이라고 소개했다. 달리 표현하자면 실정법을 곧이곧대로 적용하기보다는 입법취지를 살피고 적용할 만한 법인지를 근본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일견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자칫 무자비하거나 도리에 맞지 않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해 놓고 이런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강변하는 전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이놈의 헌법' 발언으로 법 경시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를 주도하던 세력도 떠오른다. 서울도심 한복판을 무단 점거하고 무법천지로 만든 시위대에게 현행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방해하는 인정없는 '이놈의 법'이었다. 곽 교육감 역시 자신의 '선의'를 몰라주는 공직선거법을 '이놈의 법'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좌익과 우익의 구분은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에서 유래한다. 베르사유 시내 생루이 성당에서 기득권층인 성직자대표와 귀족대표는 오른쪽 좌석에,혁명을 이끈 평민대표는 왼쪽 좌석에 앉았던 게 그 기원이라고 한다. 좌 · 우익이 영미로 가서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로 변했고,한국에선 보수와 진보좌파 진영이란 이름으로 탈바꿈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사람들이 지금 살아있다면 '선의'를 놓고 두 편으로 갈라 선 한국 사회에 대해 뭐라고 얘기할까.

김병일 지식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