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이후 최대 규모 기자회견…내외신 기자 800명 상대
'러시아판 실리콘밸리'될 스콜코보서 개혁 이미지 과시 의도
대선 출마 계획, 푸틴과의 관계 등에 답변…파격적 발표는 없어

파격적 발표는 없었다.

2008년 크렘린 입성 이후 최대 규모의 기자회견에서 대선 출마 계획 등에 대해 파격적 선언을 할 것이란 당초 예상과는 달리 그동안 수시로 밝혀왔던 국내외 정책에 대한 입장을 대부분 반복했을 뿐이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18일 모스크바 서쪽 외곽 스콜코보 지역에 있는 '모스크바 경영학교'에서 집권 3년 래 가장 큰 규모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800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회견에 참석했다고 대통령 행정실 측은 밝혔다.

스콜코보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 모토인 '현대화' 실현을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를 본뜬 첨단산업단지를 건설하려는 곳이다.

이곳을 회견장으로 선택한 데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와 차별화되는 개혁적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메드베데프는 이날 오후 1시(현지시간)부터 약 2시간 20분 동안 진행된 회견에서 내년 대선 출마 계획, 푸틴 총리와의 관계, 대(對) 서방 관계, 투옥 중인 전 석유재벌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석방 문제 등을 비롯한 다양한 현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대통령은 혼자 단상에 선 채 공보실장의 도움 없이 직접 회견을 이끌며 질문자를 선택하고 수시로 농담을 던지는 등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고 행동은 자유롭고 거침이 없었다.

◇ "대선 출마 여부 조만간 발표할 것" = 대통령은 다른 몇 가지 질문에 이어 내년 3월로 예정된 대선 출마 여부를 묻는 질문이 나오자 "그 질문을 제일 먼저 받을 줄 알았다"고 농담을 던진 뒤 그동안 여러 차례 밝힌 입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출마 여부에 대한 결정을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할 것"이라며 "그러나 아직은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될지를 발표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종류의 발표는 모든 여건이 성숙되고 최종적인 정치적 효과가 예상될 때 해야 하며 발표 형식도 기자회견이 아닌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그러나 "오래 기다리진 않을 것이며 조만간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자회견에 앞서 대통령이 대선 출마 선언과 같은 중요한 발표를 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지만 이런 기대는 결국 실현되지 않았다.

◇ "푸틴 총리와 이견 있는 것 당연" = 푸틴 총리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메드베데프는 전략적 문제에서는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지만 구체적 방법론과 같은 전술적 관점에서는 이견이 있다고 시인했다.

메드베데프는 "정치적 파트너지이자 동료인 블라디미르 푸틴과의 관계는 20년 이상 이어지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좋은 느낌을 갖고 있다"면서 "우리는 국가 발전과 관련한 중요한 문제들에서 아주 유사한 견해를 가진 동지"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모든 문제에서 의견이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각자는 자신의 느낌과 견해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은 "우리 모두는 러시아가 현대적이고 효율적인 나라가 되고, 국민이 제대로 살고 국민의 권리가 보장되며, 다변화되고 현대화된 경제가 달성되기를 원한다"며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든 견해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거듭 설명했다.

그는 일례로 "현대화 문제와 관련한 견해에서 푸틴 총리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며 "푸틴은 현대화를 차분하고 점진적인 발전으로 이해하지만, 나는 우리에게 현대화를 더 빨리 달성할 수 있는 기회와 힘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 "美 유럽 MD 강행하면 핵전력 강화 나설 것" =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추진 중인 유럽 미사일방어(MD) 시스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대통령은 "MD는 여러 나라의 전략적 가능성을 차단하는 수단"이라고 규정하고 "(미국 등은) 유럽 MD가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이란 등의 위협에 대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러시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는 아직 그러한 (전략적)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른 시일 내에 그러한 가능성을 갖출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은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나토가 솔직하게 이를 인정하고 러시아와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메드베데프는 미국이 유럽에 MD 구축을 계속할 경우 이는 미국이 러시아와 체결한 새 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을 위반하는 것으로 러시아는 협정에서 탈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통령은 "미국과 MD와 관련한 구체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원치 않지만 러시아도 대응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핵 전력을 강화하는 등의 나쁜 시나리오가 나올 수 있다"고 덧붙였다.

◇ "호도르코프스키 석방 위협 안돼" = 대통령은 또 탈세와 횡령 등의 죄로 2003년부터 수형 생활을 하고 있는 전(前) 거대 석유기업 유코스 회장 호도르코프스키 석방 문제에 대해서도 견해를 밝혔다.

그는 '호도르코프스키가 석방되면 사회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답했다.

일부에선 푸틴 대통령 시절 크렘린과의 갈등으로 투옥된 뒤 푸틴의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줄기차게 비판해온 호도르코프스키가 내년 대선 이전에 석방될 경우 그가 강력한 야권 정치인으로 변신할 것을 우려해 현 정권이 고의로 그의 석방을 미루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푸틴 총리는 지난해 12월 '국민과의 대화'에서 '호도로코프스키에 대한 태도를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받고 "호도르코프스키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재판에서 증명됐다"며 "도둑은 교도소로 가야 한다"고 말했었다.

(스콜코보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cjyou@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