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국가가 직면한 핵심 과제 중 하나는 재정문제다. 국가가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 16세기 이후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사업인 전쟁이 계속되자 유럽 각국은 엄청난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전비는 거대한 규모일 뿐 아니라 급박하게 마련해야 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내일 거액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오늘 당장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국가재정이 튼튼하려면 경제가 잘 발전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 발전은 필요조건이긴 해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로부터 국가가 얼마나 효율적이고도 공평하게 자금을 조달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 문제가 잘 해결되면 내부적으로 안정을 찾고 외부적으로 국제 경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반란이나 심지어 혁명 상황에 직면하게 되며,국제 경쟁에서 패배를 면치 못한다. 어떤 나라가 국제무대에서 승자가 되느냐, 패자로 전락하느냐의 여부는 대부분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면 왕실 재산과 국고가 뒤섞여 있고,정부 수입은 주로 국왕 직할 재산에 의존했다. 지방 대귀족이 지배하는 영주령에 대해서는 국왕이 명목상의 상급 지배권만 유지할 뿐 사실상 준(準)독립 상태였으므로,전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게다가 국가 기구의 운영에 어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한지 체계적인 기준도 없었다. 정부 재정의 개념부터 명료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왕과 정부는 우선 필요한 대로 지출하고 그 다음에 비용을 어디에선가 찾아내는 방식으로 재정을 운용했다. '수입 한계 내에서 지출한다'는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조세 분야의 혁신을 통해 재정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개는 이미 세금을 부담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강요하는 수밖에 없었고,따라서 심한 조세 저항에 직면하곤 했다. 결국 정부는 차입에 의존하게 됐다. 조세 수취로는 당장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지 못할 때 곧바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곳에서 급전을 빌리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주로 거금을 쥔 대상인들에게 돈을 빌리면서 이자율,차입기간,기간연장,차환(借換) 등 여러 조건들을 놓고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장기 혹은 단기적으로 여러 방식들이 개발됐다. 중세 이후 근대까지 국왕들이 늘 직면한 문제가 바로 차입이었고, 또 새로운 혁신이 만들어진 것도 차입이었다.

조세 수취와 차입 모두 실패한 사례로는 스페인을 들 수 있다. 유럽 전체를 지배해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야심을 가졌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푸거(Fugger) 가를 비롯한 대상인들로부터 후로(juros)라는 이름으로 600만 두카트라는 거액의 장기채를 기채해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다. 이런 거액을 급히 차입할 때에는 장차 들어오게 될 수입을 담보로 사용하는데,합스부르크 왕실의 경우에는 몇 년치 정부 수익을 미리 당겨 담보로 삼았다.

칼 5세로부터 스페인을 물려받은 펠리페 2세는 이런 상황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1556년 7월 그가 국왕의 자리에 등극해 보니 1561년까지의 국고수입이 전부 저당잡혀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과도한 정치적 야망으로 전쟁을 계속 치르는 바람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사실 스페인 정부의 차입 방식이 문제였다. 정부 차입은 대부분 아시엔토(asiento)라는 단기채 방식이었는데,이는 빌린 돈을 언제 어느 곳에서 어느 수준의 이자로 갚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만기가 되어도 거액을 갚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펠리페 2세로서는 계속 더 큰 돈을 빌리는 아시엔토를 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국유지와 광산이 부유한 상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금을 빌릴 수는 없으므로 국왕은 단기채를 장기채로 강제 전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1557년 펠리페 2세는 아시엔토를 연리 5%의 상환가능 연금(juros al quitar)으로 전환시키는 칙령을 내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선 급한 재정압박은 피했지만,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계속 채무에 시달리던 국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자율을 강제로 낮추든지,노골적으로 파산선고를 하는 것이었다.

펠리페 2세는 1560년에 정부 파산선고를 했다. 지금까지 국왕이 차입한 자금의 지불을 유예하는 대신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은으로 기금을 만들어 연 5%의 이자를 지불하며 시간을 벌다가 여건이 좋을 때 원금의 일부를 상환해 부채를 줄이겠다는 안이었다. 그러나 정부 수입이 줄고 전비 지출은 계속 늘자 이 계획도 어그러졌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연이어 정부 파산선고를 하는 것뿐이었다(1575,1596,1607,1627,1647,1653년).그러는 동안 국가의 채무는 증가했다. 1560년에 380만 두카트였던 국가 채무는 1667년에는 900만 두카트로 늘었다. 당연히 돈을 빌리는 조건도 나빠져 차입 이자율도 상승했다. 1660년대에는 정부 수입 중 70%가 이자지불용으로 사용됐다. 원금은 물론 갚을 생각도 못하지만 하여튼 그 액수는 정부 소득 10여년치에 해당했다.

근대 초 세계 최대의 식민지를 거느린 스페인은 재정 문제 해결에 실패하면서 17세기 이후 변방의 2류 국가로 내려앉고 말았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