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호랑이와 인간은 서로 삶의 터전을 존중한 덕분에 평화관계를 유지했으나 조선시대 들어 호랑이 사냥이 빈번해지면서 호환(虎患)이 급증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런 학설은 2010년 경인(庚寅)년 호랑이해를 앞두고 한반도 역사 속에서 인간과 호랑이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논하는 국제학술대회를 이틀 앞둔 13일 제시됐다.

서울대 수의대 이항 교수와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김동진 교수는 오는 15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이 대회를 앞두고 우리 조상과 호랑이의 관계 변천사를 규명하는 논문을 발표한 것.
먼저, 이 교수는 "고려 이전까지 한반도의 인간과 호랑이는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고 소개했다.

삼국과 고려 사회의 주류 사상은 짐승일지라도 까닭없는 살생을 삼가는 불교였기에 인간과 호랑이가 서로 영역을 존중하며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김동진 교수도 "실제 고려시대 지식인인 김부식과 이규보 등은 맹수를 쫓아내는 데는 찬성했지만, 적극적인 포획과 살상을 장려하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와 이 교수의 발표문에 따르면 사람이 사는 곳에서 호랑이가 물러나게 되고, 사람이 떠나면 그곳에 호랑이가 와서 살게 되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14세기 조선의 건국을 주도한 유학자들은 맹수인 호랑이를 포획하고 죽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사람과 호랑이의 평화관계가 적대적인 관계로 급변했다.

조선인들은 농업중시 정책에 따라 대대적인 농지 개간을 추진하면서 호랑이의 주된 서식지였던 저습지가 수전(水田)으로 개발된 탓에 호환(虎患)이 크게 늘었다.

조선이 호랑이 포획을 전문으로 하는 군사조직인 착호군(捉虎軍)을 편성하는 등 체계적인 포호정책을 펼치면서 한반도의 호랑이는 급격히 줄었고 결국 20세기 초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으로 명맥이 끊겼다.

호랑이를 만난 백성의 행동도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조선 이전의 한반도인이 호랑이의 공격을 받으면 일행 중 한 명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거나 희생당한 가족의 복수도 포기하는 등 호환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지만, 조선 백성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호환에 맞섰다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 13년(1379년) 경상도 안동에서 남편을 물고 달아나는 호랑이를 아내가 목궁(木弓)으로 때려 쫓았고, 세종 2년(1398년)에는 역시 안동에서 호랑이에게 물린 남편을 아내와 두 딸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가 살려낸 기록이 있다.

단종 1년(1441년) 함길도에서는 학생신분이었던 신경례가 보여준 모습은 훨씬 극적인 사례다.

신경례는 아내 내은덕과 함께 읍성으로 가던 길에 호랑이를 만났고, 호랑이는 상대적으로 쉬운 먹잇감인 아내를 물려 했다.

이에 신경례는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잡고 쓰러뜨리고서 발로 얼굴을 차고 배에 올라타 몸싸움을 벌였고 결국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호랑이를 죽일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신경례 부부와 마을 사람들의 행동은 상당한 군사적 준비와 훈련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이항 교수는 "우리는 지금 호랑이를 민족문화의 상징이자 생태계의 최고조절자로서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자연유산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지만, 조선과 일본강점기의 호랑이는 말 그대로 해수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조선의 포호정책이나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을 반성은 할 수 있어도 일방적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도 한반도에서 호랑이와 표범을 되살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이다"라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hwangc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