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오후 8시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GS홈쇼핑 스튜디오.이날 판매할 한 유명 브랜드 의류업체의 트랙 수트(Trek Suit · 야외 활동복)로 갈아 입은 쇼핑호스트 이창우 차장(39)의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밝다.

카메라 감독,MD(상품기획자),모델 등 스태프들과 방송 순서 및 멘트에 대한 최종 점검을 마치고 무대 위에 섰다. 진행을 함께 할 여성 쇼핑 호스트 신재경씨(30)도 앞선 방송을 마치고 뒤늦게 스튜디오에 합류했다.

방송 시작을 불과 몇 분 앞둔 시각.생방송 경력 7년의 베테랑인 이 차장도 다소 긴장이 되는지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기를 반복한다. 카운트다운 3,2,1! 마침내 생방송 시작을 뜻하는 'ON AIR(온 에어)'에 불이 들어오자 이 차장의 말문이 터진다.

"요즘같이 햇살이 따스한 봄날,집에만 있기 힘드실 겁니다. 밖에 나가서 무작정 달리기라도 해보고 싶은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그야말로 청산유수다. 진행 파트너인 신씨와의 호흡도 척척이다. 옷의 디자인,색상,재질 등은 물론 입었을 때 착용감,맵시까지 리얼하게 표현해낸다. 카메라가 쇼핑 호스트 대신 전문 모델을 비출 때도 두 쇼핑 호스트의 상품 설명은 쉼없이 이어진다.

이들의 활약 덕분일까. 일부 사이즈와 색상이 매진됐다는 메시지가 화면에 떴다. 시간이 지나면서 매진 품목은 계속 늘어났다. 마침내 1시간에 걸친 방송이 모두 끝났다. 1시간 내내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부은 이 차장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스친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담당 PD 및 MD와 함께 그날 방송 결과를 놓고 마감회의를 시작했다. 약 30분간의 토론을 마치고서야 긴 일과가 모두 끝났다.

▼오늘 방송은 어땠습니까.

"처음엔 콜(주문) 수가 많이 올라갔는데 방송 중반 이후 급격히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생각했던 것보다 실적이 좋지 않아요. 그 때문에 마감회의가 좀 길어졌죠."

▼열심히 했는데 속상하겠어요

"이럴 때마다 힘이 빠지는 게 사실이지만 실패 요인을 분석해 다음에 더 잘해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방송에서는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렵네요. "

▼방송이 끝날 때마다 결과가 바로 나오니 스트레스가 심하겠어요.

"사실 방송 중에도 콜 수 등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받습니다. 특수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PD와 커뮤니케이션이 지속적으로 이뤄지지요. 특정 멘트를 했을 때 갑자기 콜 수가 올라가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그럴 때면 PD가 그 멘트를 반복해 달라고 지시하기도 합니다. 저희들끼리 쇼핑 호스트를 '1분살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하루살이도 아니고 말이죠.(웃음)"

▼쇼핑 호스트로서 본인의 경쟁력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순발력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순발력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죠.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상품에 대한 연구는 기본이고 시사,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대한 지식도 쌓아야 해요. 이런 바탕 위에 다년간의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위기 대처 능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

▼평소에 어떠한 노력을 하나요.

"일주일에 책을 한 권씩 읽는 독서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마케팅 관련 서적을 많이 읽지요. 아울러 시사 및 경제 상식을 넓히기 위해 <한국경제>를 비롯한 경제신문도 꼭 챙겨서 봅니다. "

GS홈쇼핑의 간판 스타로 통하는 이 차장은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다. 1995년 한양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광고회사에 입사해 AE(Account Executive · 광고기획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98년 LG홈쇼핑(GS홈쇼핑의 전신)의 쇼핑 · 잡화 MD로 전직한 그는 우연한 기회에 프로그램에 출연해 진가를 드러내면서 쇼핑 호스트로 전격 캐스팅됐다. 그는 마케팅 분야의 다양한 경력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현재 그가 취급하는 상품도 식품,건강,이 · 미용,의류,가전,보험 등 거의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말솜씨가 거침이 없던데 대본을 따로 준비하나요.

"1시간 내내 떠드는데 어떻게 대본을 따로 준비하겠습니까. 거의 대부분 애드리브(ad lib)입니다. 물론 상품에 대한 스펙(Spec · 명세)이나 방송 순서 등에 대해서는 미리 숙지를 해야지요. 보통 방송 1시간 전부터 스태프와 함께 이러한 준비를 합니다. "

▼방송을 진행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아요.

"쇼핑 호스트로 방송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탤런트 금보라씨와 함께 방송을 진행했을 때였어요. 당시 상품은 유명 브랜드의 향수였는데 상품을 설명하던 금보라씨가 문득 향기를 한번 맡고 싶다고 했죠.그런데 제가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향수를 그만 테스터가 아닌 금보라씨 얼굴에다 뿌리고 말았죠.그러고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다행히 금보라씨가 프로답게 잘 수습해서 별 탈 없이 매끄럽게 넘어갔죠."

▼부인이 경쟁 회사의 쇼핑 호스트라면서요.

"CJ홈쇼핑에서 근무하고 있는 권미란씨(35)가 제 아내입니다. 쇼핑 호스트는 업무상 타 방송을 항상 모니터링하는데 민얼굴로 방송에 나온 제 아내가 너무 예쁜 거예요. 그래서 회사 후배에게 부탁해 아내를 소개받고 6개월 만에 결혼했죠.방송 스케줄이 달라 집에서 얼굴 보기조차 힘들지만 둘 다 서로의 일에 대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해를 해줍니다. 또 쇼핑 호스트는 방송 전에 미리 해당 상품을 체험해 보는데 저희는 각자 가져온 물건을 집에서 다 써 보니까 남들보다 두 배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죠."

▼부부가 같은 직업에 종사하니 재미있겠어요.

"사실 장인,장모님께 첫 인사를 드리러 가던 날 쇼핑 호스트라는 직업 특성을 살려 여러 멘트를 준비해 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장모님이 제 방송을 즐겨 시청하시는 팬이라 준비한 멘트 없이 바로 합격점을 받을 수 있었어요. 미사여구보다는 상품을 소개하는 호스트의 신뢰성과 진실을 담은 몇 마디 말이 호소력을 갖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죠."

▼쇼핑 호스트만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순간순간 성과가 나오니까 성취 욕구를 자극하는 게 매력이라고 할까요. 사실 홈쇼핑 업계는 '실적과 매출이 인격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냉혹한 세계예요. 하지만 그만큼 경력이나 배경보다 자신의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

▼어떤 쇼핑 호스트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저는 '친구나 가족 같은' 쇼핑 호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친구와 가족은 친근하고 또 솔직하게 대할 수 있잖아요. 저도 이처럼 항상 고객의 입장에서 상품에 대한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파악해 솔직하고 가감 없는 정보를 전달하려고 해요. "

▼쇼핑 호스트가 되려는 이들에게 들려줄 말씀이 있다면요.

"홈쇼핑에도 트렌드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차분한 설명을 통해 상품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쇼핑 호스트가 각광받았죠.이에 비해 지금은 톡톡 튀는 유머와 함께 밝고 빠른 진행이 대세입니다. 저도 지금은 거의 한계 수준인 8~9개 프로그램을 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일주일에 고작 1~2개 방송밖에 못 했던 적도 있었죠.처음에 좀 힘들더라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공을 쌓으며 기다리면 언젠가는 빛을 볼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

글=이호기/사진=김병언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