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의 역사는 길다. 문명 발상지인 수메르 지역에서 5000년 전 입술연지(rouge)가 발견됐고,고대 이집트 유물에선 남녀 모두 루주를 사용한 흔적이 나왔다. 중세에 잠시 사라졌지만 르네상스 때 되살아났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경우 루주 두께만 1㎝였다는 기록도 있다.

19세기에 금지됐던 루주는 20세기 초 겔랑에 의해 막대 모양으로 부활했다. 금속 용기에 넣은 현대식 립스틱은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미국 코네티컷에 자리한 스코빌사에서 생산됐다. 화장품은 전쟁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자동차,영화,밀주 제조에 이은 미국의 네 번째 산업으로 부상했다.

1등 공신은 립스틱.2차대전 때 공급이 가장 많이 달린 것도 립스틱이었다. 바른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의 사기를 높이고 피로감을 던다는 이유였다. 미국에선 공장의 능률 향상을 위해 여성 탈의실에 립스틱을 놔두라는 지침도 생겼다. 이런 연유인가. 경기침체기나 사회불안기엔 유독 립스틱 소비가 늘어난다고 한다.

이른바 '립스틱 효과'다. 세계적 금융 위기가 몰아친 올해도 이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소식이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국내에서도 모든 소비가 급감한 가운데 립스틱,특히 빨간색 립스틱 매출은 증가했다는 것이다. 시각은 분분하다. '계절적 요인이다''블랙패션 유행 덕이다' 등.

무엇보다 큰 건 '심리적인 이유'라고 한다. 싼 값으로 가장 뛰어난 기분 전환 효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빨간색을 보기만 해도 신진대사가 13.4% 좋아지고,빨간 불빛을 보여주고 악력을 재면 20% 세진다는 보고도 있다. 불황에 미니스커트와 붉은 립스틱이 뜨는 데 대해 여성미를 최대한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다.

그러나 '립스틱'의 저자 제시카 폴링스턴의 시각은 다르다. '여자들은 입을 무기로 바깥 세상과의 전투에 돌입한다. 옛날 사람들은 뺨이나 입술에 빨간 줄을 그려 넣어 악마를 물리쳤다. 원더우먼은 행동을 개시할 때마다 립스틱을 발랐다. 출근하기 전 립스틱을 바르고 있노라면 나도 그런 태세를 갖추는 듯한 느낌이 든다. '

립스틱은 여성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줌으로써 힘든 현실에 맞서도록 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대공황 가능성마저 점쳐진다는 마당이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서라도 헤쳐볼 일이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