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5천명 대(對) 110만명.
8일 사실상 전쟁 상태에 들어간 그루지야와 러시아의 정규군 숫자다.

군사력으론 도저히 적수가 안 되는 그루지야가 남오세티아를 지원하고 있는 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면서 결국 무력 충돌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게 됐다.

러시아는 그루지야가 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야 공화국을 무력으로 통합하려 한다면서 무력 공격 감행 시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을 수차례 천명해 왔다.

그런데 미하일 사카슈빌리(40) 그루지야 대통령은 그런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휴전 선언을 백지화하고 이날 새벽 남오세티야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국제사회의 우려를 뒤로한 채 결국 무모해 보이는 무력을 택했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국제관계대학을 졸업한 그는 1993년 미국 초청 장학생으로 뉴욕 콜롬비아대에서 법학 석사를, 조지 워싱턴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뉴욕 법률회사에서 일했다.

1995년 그루지야로 돌아온 그는 이후 2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2000년 10월 법무장관으로 임명됐지만 1년 만에 정부 내 부패와 관련 장관직을 사퇴하게 된다.

이후 그는 `국민운동당'을 창립, 그루지야 내 최대 야당 세력을 이끌게 된다.

2003년 11월 부정선거 시비로 촉발된 일명 `장미혁명'을 일으켜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당시 대통령을 사임시키면서 일약 '민주투사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며 이듬해 1월 대통령 선거에서 약 96%의 득표율로, 36세라는 유럽 정치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대통령이 되는 영광을 안는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러시아를 완전히 종이 호랑이 취급했다.

그의 뒤에는 미국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루지야가 미국의 환심을 사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에 들어가기만 하면 더 이상 독립국가연합(CIS)에 남아 러시아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일부에서는 그를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비유하기도 한다.

지리적으로 미국에 붙어있는 베네수엘라가 반미를 표방한 것이 그루지야가 반러를 내세우는 것과 같다는 이유다.

환심을 사기 위해 그루지야는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2천명의 병력을 이라크에 파견했다.

취임 직후 사카슈빌리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의 영토 회복을 선언하고 러시아 평화유지군 철군을 요구하면서 러시아와 마찰을 빚게 되며 동시에 유럽연합(EU)과 나토 가입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그는 급진적 개혁으로 무수한 정적(政敵)을 만들어냈고 대통령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등 독재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카슈빌리는 지난해 선거비 절감과 국론분열을 막는다며 애초 2009년 예정됐던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당겨 2008년 가을에, 내년 봄 예정된 총선을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치르도록 선거법을 개정했다.

야당 의원들은 그의 독재를 우려했다.

이런 여론은 결국 지난해 11월 대통령 사임을 촉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표출됐다.

정부는 비상사태 선포와 함께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면서 완전히 민심을 잃는 듯 했다.

하지만 사카슈빌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조기 대선을 통해 국민의 재신임을 받기를 자청한 것.
그리고 지난 1월 5일 실시된 대선에서 야권 후보들의 분열을 틈타 재선에 성공했다.

취임 후에는 러시아와 관계 개선을 요구하면서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러시아도 블라디미르 푸틴 전 대통령 비해 자유주의 성향으로 분류되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에 오르면서 두 나라 관계가 좋아지는 듯 했다.

하지만 지난 2월 코소보 독립에 자극받은 두 자치공화국에서 분리.독립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고 이로 인해 두 나라는 다시 급속도로 냉각됐다.

급기야 지난 1일 소규모 교전이 시작됐고 8일 그루지야군이 남오세티아 수도를 침공했고 러시아가 이에 대한 대응으로 그루지야를 공격했다.

그러나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CNN과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이 수개월에 걸친 준비 끝에 장갑차와 전투기를 동원해 그루지야 전역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AP 통신은 이번 전쟁은 그루지야로서는 큰 도박인 셈이고 `오일 머니'로 냉전 시절의 힘을 되찾은 강대국 러시아에 대항할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겠다고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그루지야가 휴전 협상을 무시하고 선제공격을 했다면 향후 서방으로 흡수되는데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도 '충견(忠犬) 역할'을 하는 사카슈빌리나 그루지야의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볼 때 이번 사태를 결코 좌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국제사회의 여론을 무시하고 공개적으로 그루지야 편을 들지 못하고 있다.

관측통들은 최근 사카슈빌리 대통령이 군 병력을 5천명 늘리고 국방예산도 추가 편성한 것이 전쟁을 염두해 둔 조치로 풀이하고 있다.

고집불통으로 소문난 그가 이번에 과연 `바위에 계란치기'식 무리수를 둔 것인지 여부는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바연합뉴스) 남현호 특파원 hyun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