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청정국' 한국이 `경유지' 역할

한국을 경유해 대량의 마약 원료물질을 아프가니스탄의 무장단체 탈레반에 공급하려던 일당이 경찰에 적발됐다.

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4일 아편을 헤로인으로 제조하는 과정에 필요한 원료물질인 무수초산(Acetic Anhydride, 無水醋酸)을 다른 제품으로 위장해 해외로 밀수출하려 한 혐의(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로 아프가니스탄인 K(47)씨 등 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K씨와 같은 수법으로 막대한 분량의 무수초산을 밀수출한 혐의로 두바이에서 체포된 파키스탄 출신 한국 국적 소지자 H(42)씨를 곧 송환할 예정이며 공범 6명을 조사 중이다.

달아난 일당 3명에 대해서는 인터폴을 통해 적색수배키로 했다.

경찰에 따르면 K씨는 일본에서 4천여만원을 주고 구입한 무수초산 12t을 경기도 안산의 한 화공약품 공장에서 국내 체류 중인 인도인 P씨와 함께 엔진오일로 위장해 이란을 거쳐 아프간 서남부 님로즈로 밀수출하려고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무수초산은 헤로인 정제 과정뿐 아니라 TNT 폭약 및 염료 생산 등에 두루 사용되는 물질이지만 아프간이 헤로인의 원료인 아편의 세계 최대 생산지라는 점과 님로즈가 탈레반의 활동 거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헤로인 정제 목적으로 밀수출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경찰은 K씨가 "탈레반의 심부름으로 무수초산을 님로즈로 밀수출해 현지 탈레반 조직에 넘기려고 한 것은 맞다"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탈레반 조직원은 아니라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또 H씨와 한국인 화공약품도매상 김모(52)씨 등 10명은 K씨 일당과는 별개로 지난해 4월부터 올해 3월까지 5차례에 걸쳐 총 50t 분량의 무수초산을 과산화수소수로 위장 포장해 파키스탄 등으로 밀수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한국을 거쳐 파키스탄으로 수출한 무수초산 14t을 3월13일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아프간 무역상에게 넘기려다 인터폴에 적발돼 범행이 들통났다.

경찰은 이들이 3월 이전에 밀수출한 무수초산 36t은 이미 아프간으로 넘어가 탈레반에 전달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K씨 일당과 H씨 일당이 한국을 경유지로 삼아 아프간에 이미 보냈거나 보내려고 했던 총 62t의 무수초산은 헤로인 30t 이상을 정제할 수 있는 막대한 분량이라고 경찰은 전했다.

헤로인의 국내 유통 가격이 0.3g당 4만여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탈레반이 62t의 무수초산을 모두 넘겨받아 헤로인을 제조했다면 천문학적인 이득을 챙겼을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경찰 관계자는 "미국이나 일본 등 무수초산 생산국에서 아프간으로 이 물질을 수출하려면 상당히 통제가 심하지만 한국은 마약청정국의 지위를 인정받고 있어 한국을 경유함으로써 국제 감시를 따돌리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국정원과 세관 등 유관기관과 긴밀히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또 K씨 등이 무수초산을 밀수출하는 데 사용한 자금이 이슬람권의 테러자금 유통원으로 꼽히는 `하왈라' 환치기 조직으로부터 조달된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유엔마약범죄사무국(UNODC)에 따르면 탈레반은 아프간의 양귀비 재배 농민과 유통업자로부터 지난해에만 1억달러(약 1천억원)가 넘는 세금을 거둬들일 정도로 마약을 통해 엄청난 액수의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강건택 기자 firstcircl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