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대불공단 전봇대'를 언급한 이후 규제 개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기업의 활동을 제약하고 각종 비용을 양산하는 나쁜 규제들을 시급히 없애야 한다는 쪽으로 사회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규제를 아무리 완화해도 소용이 없다.

일을 적극적으로 하다가 잘못을 범한 공무원은 감사원 감사에서 징계를 받지만,일을 소극적으로 하는 공무원은 처벌하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보신.늑장 공무원들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 규정을 만들지 않는한 규제 철폐는 형식적인 개혁에 그칠 수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인허가 접수 '미적미적'

'5년째 국민연금 위탁운용사로 선정,2회 연속 평가 1위.'

뛰어난 자산 운용 실적을 자랑하는 A투자자문사는 한국에서 사업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예전에는 몰랐다고 토로했다.

자산운용회사로 전환하기 위해 금융감독 당국에 예비허가 신청서를 접수시키는 데만 무려 10개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감독당국에 의견을 타진하는 등 '사전 정지작업'을 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A사 관계자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감독당국이 신청서류를 아예 받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작년 8월에는 인·허가 접수 자체가 한동안 올스톱됐는데, "신임 위원장의 방침이 어떤지 모르겠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게 당시 감독당국 실무자들의 변명이었다고 한다.

지난 17일에야 가까스로 예비허가 신청서를 접수시켰는데,마침내 숙원을 풀었다는 희열까지 느꼈다고 말했다.

◆문제는 재량적 감독규정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진입 허가를 잘 안 해주는 데는 감독의 편의를 위한 것도 있다"고 털어놨다.

시장참가자들이 늘어나면서 생길 수 있는 여러가지 감독의 문제를 꺼려 신규 인·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의 플레이어가 많아지면 감독당국이 바빠지는데 진입을 반길리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재량적인 감독규정은 보신주의 늑장행정을 더욱 부추기는 악법으로 지적된다.

금감위가 정하고 있는 증권업 감독규정 제1-10조 1항인 '증권업허가 심사기준'(인력.물적시설.사업계획의 세부 요건) 가운데 사업계획 첫째 요건은 '수지 전망이 타당하고 실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돼 있다.

"수지 전망은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마음에 들지 않으면 허가를 안 해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독소 조항이다."(금융계 관계자)

전문가들은 "일정한 형식 요건만 갖추면 진입할 수 있도독 진입 요건을 대폭 완화하는 동시에 퇴출 기준을 강화해 시장 혼탁을 막으면 될 것"이라고 권고한다.

보신.늑장행정은 영업 인·허가뿐만 아니라 상품 인가에서도 마찬가지다.

B보험사는 특정 질병을 담보로 하는 보험상품을 국내 처음으로 출시하는 데 우여곡절을 겪었다.

B사 관계자는 "금감원과 상품인가 신청서류를 낼까말까 상의하는 시간만 6개월이 걸렸다"고 말했다.

보험료 산출 방식(보험료율)이 불투명하다는 금감원의 지적에 따라 B사는 미국의 비슷한 상품 요율을 직접 확보해 금감원에 제시하기도 했다.

◆두루뭉술한 규정이 더 문제

시장 참여자들은 "법.규정이 많다고 규제가 많은 것은 아니다.

세밀한 규정이 오히려 투명할 수 있다"며 규정을 더 꼼꼼하게 만들어달라고 하소연한다.

두루뭉술한 규정이 규제의 예측성과 일관성을 떨어뜨리고 금융회사를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법규정에 근거하지 않고,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구두 지시와 행정지도가 대표적이다.

법적 근거 없이 문서로 나간 금융감독 당국의 행정지도는 작년 말 기준으로 무려 170여건에 이른다.

'××에 대한 권고안' 등 문서로 나가지 않고 전화나 회의 소집 등을 통해 나간 구두 지시까지 따지면 금융시장은 '규제와 간섭의 천국'이다.

한 신용카드사 영업담당자는 "구두 지시를 어기면 찍히기 때문에 문어발 같은 감독규정보다 더 무서운 게 사실"이라고 호소했다.

전문가들은 "구두 지시와 행정지도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구두 지시를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통제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감독규정 등 제도보다는 규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지도를 어떻게 하는지 등의 재량적 감독 행위가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이런 의미에서도 법과 규정에 금지된 것 외에는 자유롭게 풀어주는 네거티브 규제 방식을 시급히 도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