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 분석] 자유무역의 역사 … 전후 GATT체제로 교역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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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자유화는 18,19세기 영국의 자유시장주의에서 태동했다.
'자유방임'(laissez-faire)이란 말로 대변되는 이 사상은 임금 통제,빈민 지원,농업 보조금 지급 등을 철폐하고 자유무역을 뿌리내리자는 것이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펼친 자유무역에 대한 이상은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으로 이어지면서 이론적 토대를 다졌다.
◆무역자유화와 보호주의의 반격
무역자유화는 1846년 영국이 곡물의 수출입을 규제하던 곡물법을 폐기하면서 잉태됐다.
다른 나라들도 무역 규제 장벽을 헐고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각종 제품과 외국 통화를 활발히 거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9년 미국 월가의 증시가 대폭락한 뒤 이어진 대공황으로 자유무역 조류에 위기가 닥쳤다.
영국이 먼저 그 기치를 내렸다.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고 영국의 경쟁력이 약해지자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1932년 '일반 관세'를 도입했다.
미국도 '스뭇-홀리 관세법'을 제정,수입을 포괄적으로 규제하고 나섰다.
세계 각국이 보호주의로 회귀하면서 교역량은 감소하고 실업은 늘어났다.
대공황 이후 계속된 경기침체는 보호주의의 파고 때문에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은 더 악화됐고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파시즘이 대두하고 2차대전이 발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전후 GATT 체제의 성과
2차대전 직후인 1944년 연합국 지도자들은 미국 브레튼우즈에 모여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설립에 합의했다.
환율 안정과 국제수지 균형을 위한 국제기구의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미국은 무역자유화를 위해 국제무역기구(ITO)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대표로 나선 영국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유럽과 일본은 기아 문제를 푸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전쟁의 타격이 크지 않았던 미국이 나서서 시장 문호를 열어야 한다는 국제 여론이 들끓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이다.
1947년 쿠바 수도 아바나에 모인 23개국 대표들은 GATT를 통해 수입 관세 등 무역 장벽을 철폐,시장 개방을 가속화하기로 했다.
ITO는 고용,각국별 경영관행,국제 투자 등에 대한 규칙을 제정하려는 포괄적인 노력이었던 데 반해 GATT는 수입 관세를 낮추는 단순한 협정이어서 실현 가능성이 높았다.
GATT 체제에서는 총 8회에 걸쳐 교역협상이 진행됐다.
첫 라운드에선 총 4만5000건의 양허관세(일정 관세율로 인하하는 데 합의하고 나면 어떤 회원국도 그 이상으로 관세를 올릴 수 없도록 한 제도)가 결의됐다.
이후 다섯 번의 라운드를 통해 세계 각국의 수입관세는 현저히 낮아지고 교역량은 급속도로 증가했다.
1964~67년의 케네디 라운드에선 총 400억달러 상당의 관세 인하가 결정됐다.
또 1986~93년의 우루과이 라운드에선 농산물과 서비스,지식재산권 분야의 자유로운 교역이 처음으로 이슈화됐다.
GATT는 처음엔 관세 인하가 주요 이슈였으나 1980년대 들어 비관세 무역장벽을 철폐하는 쪽으로 확대됐다.
◆WTO 결성과 무역자유화 반대
1990년대 들어선 자유무역에 대한 정치적 반대 기운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교역협상이 다방면으로 확대되면서 GATT의 자유무역 체제에 위기감을 느낀 노동자 농민들이 반대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루과이 라운드를 끝낸 GATT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로 한 단계 발전했고 회원국 수도 142개로 늘어났다.
현재 회원국은 150개다.
세계화와 무역자유화에 대한 반대 물결은 WTO 성토로 이어졌다.
첫 라운드가 열린 1999년 시애틀에선 대대적인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의견 차가 커지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다행히 2년 뒤인 2001년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도하개발아젠다(DDA)를 도출하는 데 성공했다.
향후 3년간 농업 서비스업 수산업 반덤핑 분야의 개별 협상을 진행하고 회원국들은 2005년 1월1일까지 시장개방 협상을 진행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농업 보조금에 대한 선진국과 개도국 간 입장 차이 등으로 그 시한을 넘기면서 DDA 논의는 표류하고 있다.
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
'자유방임'(laissez-faire)이란 말로 대변되는 이 사상은 임금 통제,빈민 지원,농업 보조금 지급 등을 철폐하고 자유무역을 뿌리내리자는 것이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펼친 자유무역에 대한 이상은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으로 이어지면서 이론적 토대를 다졌다.
◆무역자유화와 보호주의의 반격
무역자유화는 1846년 영국이 곡물의 수출입을 규제하던 곡물법을 폐기하면서 잉태됐다.
다른 나라들도 무역 규제 장벽을 헐고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각종 제품과 외국 통화를 활발히 거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9년 미국 월가의 증시가 대폭락한 뒤 이어진 대공황으로 자유무역 조류에 위기가 닥쳤다.
영국이 먼저 그 기치를 내렸다.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고 영국의 경쟁력이 약해지자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1932년 '일반 관세'를 도입했다.
미국도 '스뭇-홀리 관세법'을 제정,수입을 포괄적으로 규제하고 나섰다.
세계 각국이 보호주의로 회귀하면서 교역량은 감소하고 실업은 늘어났다.
대공황 이후 계속된 경기침체는 보호주의의 파고 때문에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은 더 악화됐고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파시즘이 대두하고 2차대전이 발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전후 GATT 체제의 성과
2차대전 직후인 1944년 연합국 지도자들은 미국 브레튼우즈에 모여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설립에 합의했다.
환율 안정과 국제수지 균형을 위한 국제기구의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미국은 무역자유화를 위해 국제무역기구(ITO) 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대표로 나선 영국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유럽과 일본은 기아 문제를 푸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전쟁의 타격이 크지 않았던 미국이 나서서 시장 문호를 열어야 한다는 국제 여론이 들끓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이다.
1947년 쿠바 수도 아바나에 모인 23개국 대표들은 GATT를 통해 수입 관세 등 무역 장벽을 철폐,시장 개방을 가속화하기로 했다.
ITO는 고용,각국별 경영관행,국제 투자 등에 대한 규칙을 제정하려는 포괄적인 노력이었던 데 반해 GATT는 수입 관세를 낮추는 단순한 협정이어서 실현 가능성이 높았다.
GATT 체제에서는 총 8회에 걸쳐 교역협상이 진행됐다.
첫 라운드에선 총 4만5000건의 양허관세(일정 관세율로 인하하는 데 합의하고 나면 어떤 회원국도 그 이상으로 관세를 올릴 수 없도록 한 제도)가 결의됐다.
이후 다섯 번의 라운드를 통해 세계 각국의 수입관세는 현저히 낮아지고 교역량은 급속도로 증가했다.
1964~67년의 케네디 라운드에선 총 400억달러 상당의 관세 인하가 결정됐다.
또 1986~93년의 우루과이 라운드에선 농산물과 서비스,지식재산권 분야의 자유로운 교역이 처음으로 이슈화됐다.
GATT는 처음엔 관세 인하가 주요 이슈였으나 1980년대 들어 비관세 무역장벽을 철폐하는 쪽으로 확대됐다.
◆WTO 결성과 무역자유화 반대
1990년대 들어선 자유무역에 대한 정치적 반대 기운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교역협상이 다방면으로 확대되면서 GATT의 자유무역 체제에 위기감을 느낀 노동자 농민들이 반대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루과이 라운드를 끝낸 GATT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로 한 단계 발전했고 회원국 수도 142개로 늘어났다.
현재 회원국은 150개다.
세계화와 무역자유화에 대한 반대 물결은 WTO 성토로 이어졌다.
첫 라운드가 열린 1999년 시애틀에선 대대적인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의견 차가 커지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다행히 2년 뒤인 2001년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도하개발아젠다(DDA)를 도출하는 데 성공했다.
향후 3년간 농업 서비스업 수산업 반덤핑 분야의 개별 협상을 진행하고 회원국들은 2005년 1월1일까지 시장개방 협상을 진행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농업 보조금에 대한 선진국과 개도국 간 입장 차이 등으로 그 시한을 넘기면서 DDA 논의는 표류하고 있다.
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