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안팎으로 초라한 신세가 됐다. 정권의 간판과제인 우정사업민영화 관련 법안 중의원 통과과정에서 51명의 내부반란을 만나 스타일을 구긴데다 회심의 반전기회로 별렀던 G8 정상회담에서도 빈손으로 귀국했기 때문이다. 반전은 커녕 현지에서 수행기자들에게 `참의원 정면 돌파'의지를 밝힌 것이 당내 반발에 기름을 부은 꼴이 돼 상황이 더 꼬이는 양상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애초 G8 정상회담에서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각국의 지지를 얻어내고 북핵문제와 납치문제 논의를 주도해 사태타결의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존재감을 한껏 과시한다는 복안이었다.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문제로 이미 한국, 중국 등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에게 G8정상회담은 외교실점을 만회할 절호의 기회였지만 대세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뜻하지 않게 발생한 런던 동시다발 테러도 고이즈미 총리에게는 불운이었다. 테러가 주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고이즈미 총리는 아프리카 지원방안을 논의한 8일 정상회의 도중 갑자기 손을 들어 발언을 신청했다. 그리곤 느닷없이 "안보리 개혁뿐 아니라 폭넓은 분야에서 성과를 낼 수 있는 유엔개혁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문제를 끄집어 냈지만 다른 국가 정상들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회의가 끝난 후 부시 미국대통령이 스쳐지나면서 선채로 "미국은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한다"고 말한게 고작이었다. 개별정상회담에서도 캐나다와 러시아에 지지를 요청했지만 양국 모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북한문제에 대해서도 8일 저녁 만찬회의에서 "핵과 납치문제가 남아있는한 북한과 국교를 정상화할 수 없다"면서 "6자회담이 최선"이라고 역설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일본 언론은 조건부이긴 하지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7월 회담복귀 가능성을 내비친 터에 북한을 자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게 다른 국가 정상들의 생각인 것 같다고 풀이했다. 일본이 요구한 강력한 대북 압박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반면 현지에서 "우정법안의 계속 심의는 있을 수 없다"며 참의원 표결강행을 다짐한 발언으로 국내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한 상태다. 참의원 표결에 대해서는 법안찬성파도 당의 분열을 무릅쓰고 강행할 것이 아니라 가을 임시국회로 미루자는 의견이 많은 상황에서 총리 스스로 퇴로를 끊은 격이다. 자민당의 한 간부는 총리의 발언이 전해진 후 "법안을 통과시킬 생각이라면 더 이상 반대파를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안해도 좋을 말'로 쓸데없이 반대파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중의원 통과과정에서 법안이 수정되자 "정부안과 실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해 "바뀐 게 없어도 있다고 해야할 판에 중요한 내용을 수정했는데도 바뀐게 없다니 법안을 통과시키느라 애쓴 사람들은 뭐냐"는 볼멘 소리가 나왔었다. 포스트 고이즈미 후보중의 한명으로 꼽히는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 전 경제산업상은 법안 처리과정에서 보인 고이즈미 총리의 태도에 대해 "히틀러나 나치스도 하지 않을 만큼 강권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중의원 표결 `반란의원'을 차기선거에서 공천하지 않겠다는 집행부 방침에 대해서도 "오히려 명예"라며 "신생 자민당을 창당해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민주당 대표는 우정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돼도 중의원을 해산하겠다는 총리 발언에 대해 "자민당이 분열돼 치르는 선거인 만큼 민주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지TV가 우정법안 통과후인 7일 성인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율(26.6%)이 자민당 지지율(25.8%)을 3개월만에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자민당은 이날 민영화 반대파인 진노우치 다카오(陣內孝雄) 전 법무상을 참의원 우정민영화법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를 겨냥한 인사라는 평가다. (도쿄=연합뉴스) 이해영 특파원 lh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