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를 23년간 철권통치했던 사담 후세인 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미국이 쏘아 올린 미사일이 바그다드 중심부에 꽂힌 지 20일로 꼭 1년이 된다. 이라크인들은 이날을 비교적 차분하고도 담담하게 맞을 것으로 보인다. 미 군정의 통제를 받는다고 할 수 있는 이라크 과도통치 당국은 개전 1주년을기념하는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지 않다. 카밀 시아 압둘라 문화부 문화국장은 "국가공휴일로 지정될 예정인 바그다드 함락일(4월9일)에는 기념행사가 계획돼 있지만 개전일은 우리에겐 별 의미가 없어 조용히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라크의 일반 국민들도 미국의 당시 침공작전 이름처럼 `충격과 공포'로 특징지워지는 개전일에 대해선 대체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전쟁시작후 1년이 흐르면서 이라크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이라크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얘기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 등 이른바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누구나 서슴없이 말한다. 이라크 민방위군(ICDC) 소속인 잘릴 만수르(30)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 지를 비로소 깨닫게 됐다. 미군이 가져다 준 것은 바로 자유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미군의 군화에 묻어들어온 좋은 쪽의 변화가 자유라는 말엔 대부분이 동의한다. 바그다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오사마 아사드(20)는 "주택가 지붕에 빽빽하게 들어선 인공위성 안테나가 미군과 함께 찾아온 가장 큰 변화다. 우리는 이제 마음대로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됐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라크인들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고 착잡하다. 자유라는 반가운 손님과 함께 달갑지 않은 변화도 함께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1년만에 이라크인들 스스로가 보안장벽(security wall)의 나라라고 자조할 만큼 어느 곳을 가더라도 높고 두꺼운 콘크리트 장벽과 철조망이 주변 경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됐다. 이라크 사람들은 그동안 TV를 통해 이스라엘의 보안장벽을 지켜보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는데 이제는 자신들이 그런 처지가 됐다고 한탄하고있다. 또 수니 무슬림을 중심으로 한 상당수의 이라크인들은 한때 공적(公敵)이었던미국이 바그다드 심장부를 차지한 채 자신들의 개조작업을 주도하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이라크에도 서울의 동작대교와 같은 다리가 있다. 바그다드 시내를 흐르는 티그리스강에 놓인 여러 교량 중 하나인 알무알락교는연합군 임시행정처(CPA) 등 미 군정 시설이 산재한 그린존을 관통하는 도로로 이어진다. 미군은 이 다리가 원활한 교통흐름을 위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린존을 테러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이유로 일반 차량의 통행을 일방적으로 통제해사실상 다리를 끊어 놓았다. 나자 자바르 알자위(39.운전기사)는 "미국이 전쟁을 시작해 우리는 사담의 압제(oppression)에서 해방됐지만 그 순간 또다른 압제에 놓인 것"이라며 "알무알락교가그 증거"라고 말했다. 또다른 불만은 전후 재건이 지체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후세인 정권의 독재에서 고통받은 대다수 이라크인들은 미군이 오면 당장 일자리도 늘어나고 생활의 질도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입을 모은다. 그린존내 컨벤션센터에는 구직을 원하는 이라크인을 돕는 창구가 마련돼 있다.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나 헛걸음하기 일쑤다. 저항세력의 질긴 공격으로 치안불안이 지속되면서 대량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재건사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업자연맹 소속원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다륵 테익(30)은 개전 1주년에 대한 소감을 묻자 가슴 속에 묻어놨던 얘기를 그대로 쏟아냈다. "일자리가 없어 빈둥빈둥 노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미군은 거짓말만 늘어놨다. 그들이 온지 1년이 다됐지만 우리의 삶은 더 악화되고 치안불안은 심화됐다. 공중질서는 엉망이고, 종파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라크의 미래는 정말 어둡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의 주류는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면서 의도했던 변화의물결을 타는 것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라크의 옛 대통령궁 주변에서 한가롭게 조깅하는 미군 병사들을 지켜본 아사드 무라드(50.전직 언론인)씨는 "미국은 이라크를 중동지역 민주화의 전초기지로 삼으려 하고 있다"며 "그 목표에 상당히 접근해 간 듯하다"고 말했다. (바그다드=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parksj@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