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규 감독이 5년 만에 한국영화사를 고쳐 쓰게 됐다. 한국영화의 역사는 1999년 `쉬리'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된다. 막대한 물량,웅장한 스케일, 대규모 배급과 흥행 등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대의 개막을 선언했던 강제규 감독은 5년 전의 신화를 역사의 기록으로 묻고 살아 있는 전설을 창조해내는 데 성공했다. 강 감독의 새로운 도전은 영화인 사이에서도 무모한 모험으로 여겨졌다. 한국전 쟁이라는 빛바랜 소재에 150억원에 이르는 제작비를 투입하고 연기력이 검증되지 않은 주인공을 투 톱으로 내세운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개봉 이틀 전인 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메가박스에서 선보인 `태극기 휘날리며'(제작 강제규필름)는 이러한 걱정들을 깨끗이 날려버렸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뛰어넘는 생생한 전투 장면에 끝까지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탄탄한 줄거리, 캐릭터가 살아 있는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 등은 한국영화의 수준을 단숨에 할리우드 수준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 영화의 첫 장면은 6ㆍ25 참전용사 유해발굴단이 이진석 하사의 유품을 찾아내는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신원조회 결과 이진석 하사는 현재 77세로 서울에 생존하고 있는 것. 연락을 받은 진석(장민호)은 혹시 형의 유해가 발견됐을지도 모른다는생각에 손녀(조윤희)에게 집을 나설 준비를 하라고 이른 뒤 장롱에서 낡은 가죽상자를 꺼내 안에 담긴 구두를 쓰다듬는다. 장면은 바뀌어 1950년 6월 24일 서울 종로거리. 거리에서 국수를 말아 파는 어머니(이영란)와 함께 구두닦이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진태(장동건)는 중학교 5학년인 동생 진석(원빈)을 대학에 보낸다는 희망과 얼굴 예쁘고 마음 착한 약혼자 영신(이은주)과의 결혼 꿈에 부풀어 있다. 아버지의 제사를 모신 뒤 진태와 진석은 영신의 동생들과 즐겁게 물놀이를 하고영신은 진태 어머니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요"라며행복감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이 말은 다가올 엄청난 불행의 전조였다. 이튿날 아침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에 진태와 영신의 가족은 피난길에 오른다. 진태의 외삼촌이 사는 밀양으로 가려고 대구역 앞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진석은 의용군 모병관에게 끌려가고 그를 구해내려던 진태마저 군용열차에 태워진다. 낙동강 방어선에 동생과 함께 투입된 진태는 훈장을 받으면 동생을 제대시켜주겠다는 대대장의 말을 듣고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앞장선다. 전쟁의 광기에 차츰 휩싸여가는 진태와 달라지는 형의 모습을 지켜보며 허무와 공포에 빠지는 진석.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북진이 시작되고 진태와 진석의 부대는 서울과 평양을 거쳐 압록강 상류 혜산진에 도착한다. 마침내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 순간 진태에게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된다는 낭보까지 전해진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고 진태와 진석의 형제 앞에 혹독한 운명의 덫이 기다리고 있다. 가장 먼저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은 일찍이 우리나라 영화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스케일 크고 사실적인 전투 장면이다.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과 매캐한냄새까지 풍기는 듯한 포연,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장면 등은 마치 평양시가전이나 두밀령 고지 공방전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특히 총격을 맞아 전투기가 참호로 추락하는 대목과 산록을 가득 메운 중공군의 인해전술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시작부터 추리적 요소를 던져놓은 뒤 중간중간에 적당한 복선을 배치해 관객으로 하여금 줄거리에 흠뻑 빠져들게 만든 것도 칭찬할 만하다. 종반으로 치달으면서다소 억지스런 설정(관객의 재미를 위해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음)이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관객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장동건과 원빈의 연기도 돋보여 이제는 더이상 `꽃미남' 배우라는 꼬리표를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공형진과 이영란을 비롯한 조연들도 저마다 훌륭하게 제몫을 해냈다. 무엇보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돋보이는 것은 6ㆍ25라는 껄끄러운 소재를 두고낡은 이분법적 시각으로 접근하거나 이념의 허무함을 상투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것. 휴먼 드라마와 액션 블록버스터를 적절히 배합해 재미와 감동을 잘 살려냈다. 이제 우리는 `실미도'가 하루하루 세워가고 있는 관객동원 신기록이 얼마나 빨리 깨질지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heey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