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특정한 인지(認知)세계의 범주에 머물러 온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일깨우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여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에티오피아계 유태인들이 그런 경우의 전형을 보여준다. 1980년대 초반,멩기스투 미리암의 독재정권이 가하는 탄압과 기근 속에서 수십세기 동안 유태문화의 전통을 지켜온 에티오피아계 흑인 유태인,'베타 이스라엘(유태의 후예)족'들이 겪고 있는 수난이 이스라엘 본국 정부에 전해졌다. 이스라엘 정부는 급히 사절단을 '베타 이스라엘'들이 살고 있는 아비시니아 고원의 한 마을에 파견했다. 사절단 대표가 자신을 소개하자 이 종족의 대표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눈이 파란 백인이 아니오.어떻게 백인이 유태인일 수 있단 말이오." 구약성서 열왕기에 등장하는 솔로몬왕과 시바 여왕의 후예로 수천년을 철저한 문화적 단절 속에서 할례식과 안식일 엄수,돼지고기 금식 등 고유한 유태전통을 지켜온 그들은 자신들을 '지구에서 마지막 남은 유태집단'으로 알고 있었다. 마을 외에는 몇 km 바깥에도 나가본 적이 없는 그들에게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는 믿기 힘들었을 것임에 분명했을 터다. 가까스로 고비를 넘긴 LG카드 사태 수습과정에서 진땀 꽤나 흘린 정부 관계자들의 모습과 '베타 이스라엘'들이 맞닥뜨렸던 문화적 충격이 오버랩된다. 정부와 채권은행단,LG그룹은 줄다리기 끝에 지난 9일 밤 산업은행에 LG카드 단독 관리를 맡긴다는 수습 방안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정부의 그간 '믿음'이 철저하게 깨지는 현실을 목도했다. LG카드 인수에 대한 채권은행들의 참여 비율을 높이라는 요구에 국민은행 신한은행 등 민간은행측은 "시장원리대로 하라"며 맞섰다. LG카드를 부도로 몰고갈 경우 금융권 전체에 27조원의 연쇄 부실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며,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은행들의 잘못된 여신도 한몫 한 만큼 '시장의 실패'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라는 게 정부의 논리였다. 그러나 채권은행들은 정부가 손짓만 하면 군말없이 따라오던 존재가 더 이상 아니었다. 채권은행들은 '국책은행의 더 큰 역할'을 요구하며 상황을 '폭탄게임'으로 몰고 갔다. 이쯤 됐으면 정부는 보다 본질적인 수습책을 내놓았어야 했다. 방만한 대출의 결과로 맞은 외환위기로부터 배운 게 없는 은행들에 '최악의 상황'을 다시 학습하도록 하든지,사태의 뒷감당에 자신이 없다면 '할 수 있는 일'과 '안 되는 일'을 구분해 대처하는 게 마땅했다. 그렇게 해야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에 대해 국내외 투자자들이 불안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은행들을 기관 이기주의적인 상업논리로 무장시킨 것은 외환위기 이후 금융 구조조정을 밀어붙인 정부였던 만큼,달라진 세상을 한탄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정부는 정공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은행들에 '사정'하는 초라한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어떻게 해서든 사태를 미봉하고 보자는 식이었다. 김진표 경제부총리는 채권은행장들을 직접 독려하고,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 핵심 국장들을 통해 채권단 간부들을 압박하면서 "오늘 중 다 해결될 것"이라는 장담을 며칠간 되풀이했지만 번번이 은행들의 퇴짜 속에서 '부도수표'를 내는 모습은 안타깝기 이를 데 없었다. '관치(官治)로 만사를 형통시켰던' 과거의 문제 해결 공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부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지 답답할 따름이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