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8년 가을 김포공항 출국장. 007가방을 든 여러 명의 승객이 대만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검색대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이리 좀 오시죠"라며 기관원의 제지를 받았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삼성전자 반도체 기술 유출사건의 범인들이 잡히는 현장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20여명의 국내 톱 엔지니어들은 아예 기술판매 회사를 차려놓고 조직적으로 해외 반도체업체들과 접촉했다. NTC UTRON 등의 대만업체들과는 2백50만달러에 기술을 제공하고 관련 연구원들도 전직하는 계약을 맺기까지 했다. 공항에서 체포된 이들 연구원의 가방에서는 첨단 반도체 기술자료가 들어 있는 수십개의 하드디스크가 나왔다. 하지만 국가기간산업의 기밀 유출을 시도했던 이들에게 내려진 처벌은 말그대로 '솜방망이'였다. 주범인 김 모씨만 징역 3년을 받았을 뿐 나머지 관련자들은 모두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이는 초범인 연구원들에게 법원이 관용을 베푼 측면도 없지 않겠지만 현행 법령의 처벌규정 자체가 약했던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산업스파이를 처벌하는 거의 유일한 법률인 '부정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은 "기업의 전·현직 임직원이 그 기업에 유용한 기술상의 영업비밀을 제3자에게 누설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형법 및 특허법에도 영업비밀 침해와 관련된 조항들이 있지만 처벌강도는 오히려 더 낮다. 삼성 관계자는 "요즘 첨단기술의 경제적 가치는 추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며 "핵심기밀의 유출로 인해 국가경제와 해당기업이 입는 막대한 피해를 생각하면 처벌이 너무 경미하다"고 지적했다. 현행 법률은 또 미수범을 처벌하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회사 기밀을 빼돌린 것만으로 처벌할 수는 없고 실제 제3자에게 제공하기 위한 행위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다. 여기에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기업)의 고소가 있어야 처벌이 가능한 '친고죄'의 성격도 띠고 있다. 기밀 유출이 외부에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기업들이 고소를 포기할 경우 관련자들은 법의 포위망을 손쉽게 벗어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기밀이 유출돼도 사실상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경쟁사가 사내 직원을 시켜 수백억원짜리 기술을 빼내 가더라도 현실적으로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이 마땅치 않다. 손해배상 청구소송 또한 상대방이 명백하게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저 골치아픈 송사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이 외국기업이라면 손을 써볼 방도가 거의 없다. 얼마전 중국에서 기밀을 유출당한 통신장비업체 Y사. 현지 채용한 직원이 어느 날 기술자료들을 갖고 사라져버렸다. 이 회사가 특허를 내려고 준비 중인 기술이었다. 현지 당국에 신고해 피해를 호소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Y사 관계자는 "이곳에서 특허를 내면 바보 소리를 듣는다"며 "나중에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무조건 도둑맞지 말아야 한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