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os.gomez.mg@bayer.co.kr 어린 시절 나에게 가장 친숙한 단어는 '군대'와 '군인'이었다. 군인이셨던 아버지에겐 여섯형제가 있었는데 그들 모두 군인이었으며,나의 두 고모 또한 군인들과 결혼하셨다. 이런 이유로 우리 집에는 언제나 군복을 입은 사람 투성이였으며,가족들의 사적인 모임에서조차 오고 가는 대화는 온통 거국적인 것뿐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어느덧 전통이 돼버린 우리집에서 장남인 내가 아버지의 뒤를 따라 군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다. 기업활동을 통해 조국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관학교로 가야 했다. 문제는 사관학교 입학 이틀째부터 터졌다. 나는 상급자에게 그의 명령에 내가 왜 복종해야 하는 지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다. 물론 나의 요구는 묵살됐고,이후 4주내내 새벽 4시에 시작되는 혹독한 훈련에 참가해야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가족들의 상심은 매우 컸다. 특히 내가 훌륭한 군인으로 커 나가길 바라셨던 아버지에게는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두 달이 채 되지 않아 아버지는 나를 군대에서 해방시키기로 결심하셨다. 군 생활에서 벗어난 후 나는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기를 원했다. 당시 10대였던 나에게 미국이란 낭만과 록음악의 나라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내 생각에 강하게 반대하셨고,내게 필요한 것은 극기와 훈련이라고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나를 독일로 보내기로 결정하셨고,얼마 후 나는 독일행 배에 올랐다. 독일에는 내가 공부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돼 있었다. 6년 후 나는 공부를 마치고 콜롬비아로 돌아와 바이엘에 입사했고,지금은 대한민국에서 바이엘코리아 사장으로,유럽상공회의소 회장으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다. 때때로 내가 군인이 되었으면 어땠을까,독일이 아닌 미국에서 공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결론은 지금의 나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내 인생의 여러 곳에서 나와 기꺼이 줄다리기를 하셨던 아버지의 현명한 선택 덕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느덧 장성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나는 훗날 내 아이들이 나와의 줄다리기를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