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후 복구사업에서 미국뿐 아니라 유엔이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유엔은 국가간 분쟁이 끝난 후 평화유지 활동을 할 경우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엔이 중심이 돼 분쟁 그 자체를 해결하는 데 성공한 예는 거의 없다. 지난 50여년간 일어났던 국제 분쟁을 돌이켜 봐도 유엔이 제 기능을 한 경우는 1950년 한국전쟁과 12년 전 걸프전을 합쳐 두 번밖에 없었다. 유엔에 대해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서는 안된다. 유엔이 세계 평화를 가져다주는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라크 전쟁에 앞서 유엔 결의를 둘러싸고 지리하게 계속됐던 혼란 상황을 되돌아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이라크 복구사업 처리문제에서도 유엔에 너무 큰 기대를 거는 것은 어리석다. 전후 처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라크 내 모든 세력을 대표하는 임시정부를 만드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잊어서는 안되는 점이 있다. 특히 미국은 민주주의를 받아들일만한 토양이 없는 나라에 민주주의를 도입시키려고 하다가 몇번이나 실패한 역사를 갖고 있다. 미국의 가치관을 다른 나라에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이라크에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면 안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법에 따른 통치와 평화적 정권이양을 근본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그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민주주의를 강요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모든 나라는 그 나라에 맞는 독자적인 민주주의 모델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미국은 이라크 전후 중동정책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게 된 지난 수십년간의 중동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라크 전쟁의 원인을 독재자 사담 후세인 대통령 1인으로부터 찾는 것은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근본 배경은 지난 30여년간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이 번갈아 가며 잘못된 중동정책을 취해왔다는 데 있다. 최초의 정책 실패는 중동지역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해온 영국이 중동에서 손을 떼면서 시작됐다. 영국이 중동에서 완전히 철수한 후 미국은 혼자 힘으로 중동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짐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지난 1991년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조지 부시 당시 미 대통령은 중동정책을 석유문제 중심으로 판단하고 결정해 왔다. 그 뒤를 이은 빌 클린턴 정부시절에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반미 감정이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이런 상황은 2001년 9·11테러로 연결됐다. 세계평화를 위해 먼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분쟁을 해결해야 한다. 팔레스타인측이 테러를 중단하도록 하는 것이 선결 과제다. 그러나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한 중동평화는 어렵다. 또 하나 남은 과제는 북한 문제다. 일부 전문가들은 최악의 경우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의 무력 충돌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최근 50여년 이상 지속돼온 위기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무력 분쟁을 일으킨 적은 없었으며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 이게 바로 '핵 억지 효과'다. 만약 북한이 재래식 무기로 한국을 다시 공격한다면 북한 스스로가 훨씬 더 큰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정리=최인한 기자 janus@hankyung.com -------------------------------------------------------------- ◇이 글은 알렉산더 헤이그 전 미국 국무장관이 니혼게이자이신문(4월13일자)에 기고한 칼럼 '국제분쟁과 유엔의 한계'를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