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자키 사장은 신념에 찬 경영자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줄 알았다.

지난 94년 7월부터 10개월간 계속된 브리지스톤화이어스톤 (BFS)의 파업을
해결하는데도 그의 위기관리능력이 힘을 발휘했다.

파업은 결국 회사측 승리로 끝났다.

노조와 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물론 가이자키 사장.

95년 1월 클린턴 미 대통령이 직접 BFS의 사측 대응방식에 유감을 표명하는
사태까지 빚어졌지만 회사측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파업이 끝나고 종업원이 직장에 복귀했지만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전미 고무노조(URW)가 전미 철강노조 (USWA)와 연대해 항의하는 상황이
되풀이됐다.

이에 가이자키 사장은 설득에 나섰다.

이번 파업은 회사측이 제시한 협상안을 노조가 전면 거부하며 "굳이어
타이어"와 동일한 노동조건을 요구한데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굳이어는 공장의 60%가 주 7일의 연속 가동으로 BFS보다 생산성이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욱이 BFS 종업원의 평균 수입은 6만5천달러로 테네시주의 교사평균
연봉(3만달러)보다 많다.

그런데도 임금에 불만을 나타내며 파업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BFS경영이 흑자로 전환됐지만 아직도 안정적인 경영기반을 구축하지는
못했다는게 가이자키 사장의 판단이었다.

사실 BFS의 인수는 일본 브리지스톤 본사의 존폐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한 사업이었다.

파업이 장기화되자 95년 1월 가이자키 사장은 시장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임시 고용직원 2천3백명을 정규 종업원으로 채용했다.

과감한 조치였다.

그리고 5월이 지나서야 대부분의 조합원이 직장에 복귀했다.

파업의 영향으로 노사 양측은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조합측도 과거 예에 비춰 언젠가는 회사측이 양보안을 낼 것으로
생각하다가 낭패를 본 셈이다.

가이자키 사장은 해외 사업장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매년 열리는 노사협상에서 회사측이 양보를 거듭한 결과 회사부담이
늘어나 회사의 재무내용을 악화시켰다"며 다시는 이같은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BFS의 파업이 미.일간 정치쟁점화될 정도로 문제가 확산되는데도 가이자키
사장이 굴하지 않은 것은 이같은 나름의 신념에 따른 것이다.

그는 BFS는 미국의 회사라는 점을 강조했다.

4만명의 종업원중 일본인은 단 100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회사문제를 두고 정치문제화하는 것은 양국 모두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파업종료를 이끌어 냈지만 감정의 골이 깊어진 전미 고무노조(URW)와
협약을 맺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URW는 전국적으로 BFS 타이어 불매운동을 전개하기까지 했다.

이에 맞서 가이자키 사장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타이어판매 수량이 줄면 우선고용 리스트에 있는 기존 종업원이 직장에
복귀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준다"며 "값싸고 품질좋은 상품을 구매하는데
세계 제일인 미국 소비자는 반드시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가이자키 사장은 파업해결과정을 통해 오히려 노조측과 단체협약내용을
재정립해 유연한 경영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 결과 판매확대와 코스트 절감을 동시에 달성해 회사 경영실적은 점점
개선됐다.

신규 채용자 2천3백명과 복직자 1천3백명은 이미 회사에서 제시한 새로운
노동조건에 합의했고 이는 회사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2월 18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