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콘크리트 도시공간.

그러나 그녀의 손을 거치면 생기를 찾는다.

과거속에 묻혀 있던 고성도 현대와 조화를 이룬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단절된 두 지역은 하나로 만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문명에서 소외된 인간들은 다시 인간성을 회복한다.

공간디자이너(space designer) 김현선(42)씨.

그녀는 매일 죽어 있는 도시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 매달린다.

"기능"만 강조했던 도시공학에 "감성"을 이입하는 작업.

생활주변을 편리하고 예술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재창조 과정이다.

그녀의 손끝에서 생명을 되찾은 도시공간은 한둘이 아니다.

인간성 상실의 극치였던 청와대 안가가 효자동 사랑방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데도 참여했다.

혐오시설의 대표격인 울진 원자력발전소가 친근한 환경친화형 공간으로
변모중이다.

올림픽공원의 무뚝뚝한 연돌이 부드러운 조형물로 변했다.

2000년에 있을 ASEM(아시아유럽정상회담) 휘장공모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선된 것에 그녀는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다.

"공간디자인"은 도시공간과 관련된 모든 작업을 포괄한다.

한 건물의 외관에서 도시전체의 조형미를 다듬는 것까지.

대상물은 다르지만 일반 대중들이 호흡하는 공적인 공간(public space)
이란게 공통분모다.

따라서 주관적인 시각보다는 객관적인 미가 더욱 강조된다.

대중을 위한다는 "사명감"이 다른 어떤 예술장르보다 필요한 이유다.

이 사명감은 그녀에게 혼기마저 잊게 만들었고 그덕(?)인지 그녀는 이제
이 분야에서 "대가"로 통한다.

15년전만 해도 공간디자인분야의 문외한이었던 그녀의 성공비결은 일에
대한 열정.

서울대 생활과학대를 나와 일반기업에 취직했던 그녀를 짓누른건 "공부"에
대한 미련이었다.

86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문부성장학생으로 도쿄예술대에
진학했다.

이나지 도시로, 모치즈키 세키 등 기라성 같은 교수들의 지도를 받은
그녀는 91년 이 대학에서 미술학박사를 취득, 환경디자인부문에서 국내
최초의 박사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재학중에도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여 다나카미술관 디자인으로 일본건설성
건축설계우수상을 받는 등 4개의 현상공모에 당선됐다.

졸업후 들어간 곳은 GK.

일본 최대의 공간디자인 회사다.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 보던 회사측이 먼저 스카우트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92년 한국주택공사의 산본신도시 색채디자인 현상공모에
응모, 최우수상을 받았다.

거대한 신도시 구석구석에 그녀의 손길이 배어 있는 셈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일본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하지만 서울의 무질서한 "도시공간"은 그녀를 놔두지 않았다.

각종 프로젝트 요청이 쏟아져 들어왔다.

떠날수가 없었다.

공부를 잠시 접어둔채 "김현선 디자인연구소"를 세웠다.

그동안 50여건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지만 지금도 머리속은 해야 할 일로
꽉차 있다.

대한민국의 공간이 모두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탓이다.

그녀의 "사명감"은 공간디자인분야의 활성화로도 이어지고 있다.

이를위해 계원조형대학 겸임교수를 거쳐 지금은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96년엔 국내 처음으로 "서울 퍼블릭 디자인전"을 열어 젊고 유능한
공간디자이너들에게 작품을 선보일 기회를 마련했다.

그녀가 일관적으로 추구하는 작품테마는 과거로부터의 (시간)회복, 멀어진
곳들로부터의 (공간)회복, 소외로부터의 (인간성)회복. "단절의 복구"란
말로 함축된다.

"끊어진 과거와 현재, 이쪽과 저쪽을 감성적으로 결합해 주는게
공간디자인이너들의 역할이지요"

그녀는 오늘도 계속 꿈을 꾼다.

단절의 복구를 통해 죽은 도시가 생동감있게 부활하는..

< 육동인 기자 dongi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11월 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