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태 <산업연구원 부원장>

김대중 대통령은 중앙부처 청사에 직접 나가 금년도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이는 온 국민이 대량부도와 실업, 그리고 임금삭감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에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경제회생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는 자세를 공무원은 물론 온 국민에게 몸소 보여준다는 상징적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각 부처를 순시하면서 발벗고 나선다는 사실은 상징적
수준 이상의 큰 의미를 갖는다.

6.25동란 이래 우리에게 닥친 최대의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고통감내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호소 설득해서 개혁에 대한 지지와 열정을 이끌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더해 개혁의 구체적 청사진을 마련하고 실천되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고통스러운 개혁과정이 결국은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때에 개혁을 지지하게 된다.

따라서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구체적인 개혁프로그램이 제시되고
실천가능성이 점검되어야 함은 물론 개별 부처의 개혁방안들이 범정부적
차원에서 종합 조정되어서 개혁과제간의 일관성이 확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전후에 수차례에 걸쳐 IMF위기는 1년반 내지 2년
이내에 극복할 자신이 있음을 국민 앞에 약속한 바 있다.

국민들은 지금 이를 믿고 명예퇴직 정리해고의 아픔과 생활수준저하의
어려움을 참아내고 있다.

만약에 구조조정의 어려움이 장기간 지속되면 현정부는 정치적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영국의 대처총리가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강력한 긴축정책을 밀어붙일
때에 기업은 파산하고 근로자는 직장을 잃었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의원, 심지어 각료중에서도 대처총리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고, 2백50명의 영국 경제학자들은 개혁을 완화하라는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만약 영국경제가 2년 이내에 회복되지 않았더라면 내각제 민주주의국가인
영국에서 대처정부는 더이상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나라는 5년 임기의 대통령중심제이기 때문에 개혁을 할수 있는
기간이 더욱 길다고 볼수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산술적인 의미에
그치는 것이고, 개혁효과가 늦게 나타나게 되면 개혁에 대한 기득권층의
저항과 일반국민의 개혁불감증이 두드러질 것이다.

필자의 관찰로는 개혁의 강도와 속도에 비례해서 경제의 회복속도도
빨라지는 경향이 있다.

1983년 IMF구제금융을 받았던 칠레, 1995년에 역시 IMF구제금융을
받았던 멕시코는 과감한 경제자유화와 공기업민영화 등의 개혁조치를
단행해 2~3년만에 정상적인 경제성장궤도에 진입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아직도 관주도 성장방식에 대한 미련을 털어내지 못하고
규제완화와 대외개방에 소극적인 결과 장기간의 경기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의 대통령업무보고를 통해 향후 경제개혁의 강도와 속도가 대략
그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현재까지의 양상을 보면 대통령이 개혁에 대한 의지와 열정에 있어
각 부처보다 앞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대적 인수-합병의 조기허용 ,외국인의 토지소유 허용, 한보 기아 등
부실기업의 조기처리 등과 같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과거의 사고와
관행의 틀을 깨지 못해 머뭇거리던 사항에 대해서 직접 독려하는 점에서
우리는 대통령의 의중을 읽을수 있다.

변화와 개혁은 시대적 요청과 지도자 개인의 지성 감성등 3박자가 일치할
때에 비로소 강력한 추진력을 얻는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는 국민적 여망을
수용해서 빈곤을 직접 체험하면서 수준높은 교육을 받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지도자들이 있었다.

지난 30여년 동안 우리나라 경제를 지배해온 관주도 고도성장의 신화는
60년대 변화와 개혁의 산물인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30년전과는 반대방향의 변화와 개혁을 요구한다.

권위에서 민주로, 정부개입에서 시장자율로, 보호에서 개방으로의
요구이다.

만약에 김대중대통령이 오랜 민주화투쟁과 한국경제의 구조적모순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에서 형성된 지성과 감성을 갖추고 있다면 우리 나라는 다시
한번 재도약의 기회를 맞이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행스럽게도 대다수 국민들은 지난 대선 이후 지금까지의 대통령의
실적을 보면서 이와 같은 기대가 현실될할 것으로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의 대통령 업무보고는 결코 보고를 위한 보고에 그쳐서는 안된다.

업무보고가 끝나면 보고시에 이루어진 토론을 반영하고, 범정부
차원에서의 일관성이 검증된 다음에 구체적인 실행일정이 짜여져야 한다.

그 다음에는 실천상황과 효과에 대한 평가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되고
그 결과가 다시 개혁 과정에 피드백 되어야 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