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야 산다.

이대로는 안된다.

우리 생존을 위해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역사 초유의 IMF시대를 한탄하면서 "경제신탁"이니 "경제신민"이니 하며
자조해 봤자 남는 건 허탈뿐이다.

외화 대란으로 대외채무지급불능사태를 아슬아슬하게 몇차례 넘기면서
우리는 비로소 눈을 떴다.

한반도 울타리를 넘어 세상을 다시금 보게 된 것이다.

세계 11대 경제대국이라며 당당하게 뽐내던 국민들이 이제야 세상을 바로
보게 됐다.

엊그제까지도 거들먹거리던 자존심은 다 어디가고 여기저기 손을 내미는
참담한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승천하던 용이 벼락을 맞고 떨어져 지렁이로 둔갑했다는 어느 외국경제학자
의 비아냥은 참을 수 없는 모멸감마저 느끼게 한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외지의 보도가 어쩌면 그리도 혜안이
있었는지 새삼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냉혹한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체면이 상한다고 지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감정적인 반응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물안 개구리식의 처신이 가져온 자업자득이기 때문이다.

불과 1년 남짓 전 우리정부는 선진국 사교클럽인 OECD에 가입하고선 큰
경사인양 잔치만 벌였다.

당연히 지켜야할 OECD의 룰은 백안시했다.

외환사태로 비롯된 경제파탄은 국제사회의 룰을 무시한데서 온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것만 채우려고 욕심을 부렸지 좀처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텅빈 곳간(외환보유고)과 고질적인 제도등 모든걸 덮어두려고만
했다.

11대 경제대국의 체면에 우리의 환부를 보이는 건 큰 수치라는 생각에서
였다.

그들은 우리의 환부가 곪아가는 것을 유리병 속 들여다 보듯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데도 우리만 아니라고 우겨댔던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한국의 경제기초(펀더멘틀)는 튼튼하다고 큰소리를
쳐댔다.

여기에는 전문경제관료라는 사람들이 앞장서 나팔수 노릇을 했다.

이런 무책임한 집단이 저지른 죄과를 죄없는 국민이 대신해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 죄과는 바로 실업의 공포, 소득의 감소, 신용도 추락, 고물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잘잘못을 따질 여유도 없다.

시련을 오직 희망으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명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IMF를 활용해야 한다.

IMF를 악마가 아닌 천사로, 저주가 아닌 복음으로, 첩자가 아닌 전령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짧은 산업역사에도 불구하고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로
칭송을 받아 왔다.

많은 저개발 국가들이,과거 공산국가들이 "한국 모델"을 원용하기에 바빴고
인도시인 타고르가 말한 "동방의 등불, 한국"은 "Look East"로 다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만큼이나 하상의 적폐물도 쌓여만 갔던게 사실이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금융산업의 개편, 자본시장 자유화, 시장개방, 노동시장의 유연성 등은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숙제들이었다.

이 난제들을 IMF가 대신 해결해 주고 있는 셈이다.

IMF가 준 더 큰 현실은 세계를 새로 이해하는 계기를 우리 모두에게 마련해
줬다는 점이다.

우물안 개구리식의 사고와 행동양태에 일대 경종을 울려줬다.

새 역사의 시간표는 "틀"을 바꿔 새 "틀"을 짜라고 요구한다.

여기에는 경제주체들이 새로운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 계약은 다름 아니다.

정부는 금융이나 기업에 손대지 않고 공정한 게임만을 보장하겠다는 선언을
해야 하고, 노동자는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생산성 향상에만 전념
하겠다는 서약을 해야한다.

기업도 정부의존적이고 방만한 경영에서 벗어나 책임경영에 전력투구해야
한다.

이 계약은 기존의 모든 패러다임을 바꿔 가는 첫 단계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틀을 짜는데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수반된다.

바로 욕심을 버리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군림하는 자세에서 봉사하는 공복의 정신으로, 기업인은 로열티나
주고 베끼는 손쉬운 모방보다는 창조의 인내를 견뎌야 한다.

근로자는 무엇인가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경영자와 함께 간다는
2인3각의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 어떤 분야의 지도자건 변화를 겁내지 않는 열정과 용기를 가져야 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환경속에서 우리사회의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한다.

이 구조조정은 철저하게 무에서 시작돼야 한다.

게다가 구조조정 작업은 분초를 다툴 정도로 시급히 이뤄져야 함은 물론
이다.

구조조정의 착수가 빠르면 빠를수록 그 고통의 터널은 짧아진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이 변화는 어쩔수 없이 새"틀"을 짜도록 강요하고 있다.

새"틀"을 만들어가는 작업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다.

어깨 겯고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

박영배 < 편집국장석 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8년 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