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

"기억이 안난다"

"증인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신성한 국회에서 국민이 바라보고 있는데 진실을 말하세요"

온 국민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의욕적으로 시작된 국회한보국정조사
특위가 기억나게 하는 증인과 특위위원들의 대표적인 발언들이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로 끝나 버린 30여일간의 특위활동을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닉슨을 사임케했던 워터게이트청문회나 이란 콘트라청문회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번 5공청문회에 이어 두번째로 열린 한보청문회도
3류라는 우리 정치의 수준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데 그쳤다.

그나마 화끈한 정치쇼마저 보여주지 못한채 말이다.

각종 의혹에 대한 철저한 조사는 아예 시도조차 못해보고 신문의 대부분은
시중에 나도는 설이요 답변은 예정된대로 모른다가 아니면 기억이 안난다
였다.

이 정도라면 청문회는 차라리 열리지 않은 것만 못하다.

오히려 국민들의 답답증세를 더하게 만들고 증인들에게는 변명할 기회만
제공했다는 비판을 벗어나기도 어렵게 됐다.

검찰의 수사가 진행중이니 한보와 관련한 숨겨진 진실들이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남아있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될 정도다.

대한민국에서 좋다는 대학을 나오고 법조계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포진한 한보특위가 어쩌다가 이런 평가밖에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일부 특위위원들은 제도자체의 결함을 지적하고 있다.

조사활동 시간이 너무 부족하고 관계기관의 자료제출협조가 잘 안됐다는것
등등 특위위원들이 내놓는 변명들이 사실 그럴듯하기는 하다.

청문회에 대한 일반의 평가가 지극히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나자
여야정당들이 서둘러 제도개선을 들고 나오는 것도 이런 평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청문회제도가 가장 잘 마련돼있는 미국의 예를 보면 우리의 청문회방식에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보청문회를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답답해했던 것은 실체를 밝히려
하지 않고 부인으로 일관한 증인들의 태도와 이를 추궁하지 못하는 의원들의
자세였다.

미국 청문회의 경우 증인들의 입을 열게하기 위한 갖가지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다.

증언자들이 진실을 밝힐 경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 면책특권을 준다.

1976년 박동선사건관련 청문회에서 박씨가 진실을 밝히는데 이 면책특권은
위력을 발휘했다.

그뿐이 아니다.

미국의 조사위원회는 특별검사를 임명,방대하고 치밀한 조사를 해낸다.

조사위원들은 이를 토대로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물론 조사기간은 우리의 국정조사특위와 비교가 안된다.

워터게이트청문회의 조사기간이 5개월이 넘었고 이란 콘트라때는
15개월이나 걸렸다.

빨리 빨리와 대충 대충이 우리 청문회의 신조라면 미국의 그것은 끈기와
치밀함이다.

제도의 미비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특위위원들의 저조한 활동이
당연한 것으로 평가할 수 는 없다.

야당의원들은 여당에 흠집을 낼 수 있을 만한 문제나 동료의원의 혐의를
벗기는데는 열과 성의를 다하는 모습을 보였고 여당도 야당 흠집내기에
주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거유세를 하는 것인지 신문을 하자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장광설을 늘어
놓고 답변은 아예 바라지 않는다는 듯 "됐어요"로 증인의 입을 막는 모습도
보였다.

애꿎은 국민을 들먹이고 협박을 하거나 호소로 일관하는등 의원들의
솜씨는 한마디로 아마추어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잠자는 사람을 깨우기는 쉽지만 잠자는체 하는 사람을 깨우기는
어렵다"는 평범한 사실을 그들은 몰랐던 것인가.

특위활동을 벌이다가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면서 특위에서 물러난
의원들은 우리의 청문회방식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처음부터 몰랐단
말인가.

완벽한 제도란 없다.

미국의 청문회가 오늘날의 틀을 갖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우리도 제도를 완비해 진정한 청문회를 펼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청문회에 참여하는 특위위원들의 의식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번지르르한 말의 잔치가 아니고 충분한 조사를 통해 사실을 제시하며
증인의 솔직한 답변을 유도하는 그런 신문방식이 나와야 한다.

의원들이 전가의 보고처럼 내세우는 "신성한 국회"도 그때에야 비로소
제 무게를 갖게 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