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 한국이동통신 사장 >

1993년 7월말, 체신부의 경상현 차관이 오찬을 제의해 왔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장관의 뜻이라며 연구소(ETRI)가 주관하고 있는
디지털이동통신(CDMA) 개발사업을 맡아 달라고 했다.

1주일 뒤에는 윤동윤 장관과 만났는데 그는 CDMA말고도 직접방송위성(DBS)
사업과 개인휴대통신(PCS) 사업도 함께 관장하는 협의회를 장관 직속기구로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곧 이어 체신부의 국장 일행이 KIST로 찾아와 내게 사업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설명을 듣고난 뒤의 소감을 솔직히 말하면 CDMA 사업이 "TDX 신드롬"에
걸려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TDX 신드롬"이란 TDX가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그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연구소는 프로젝트만 주면 무엇이든 개발을 해내고 사업단만
만들어주면 저절로 관리가 되는 줄로 아는 사람들의 착각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사실 CDMA 개발은 TDX와 달리 연구소가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제조업체들
(LGIC 삼성 현대 맥슨)이 엄청난 돈을 내고 외국업체(Qualcomm)의 기술을
사다가 상품을 개발하는 일일진대 CDMA분야의 권위도 없고 이동통신시스템의
운용이나 제조에 생소한 연구소가 과연 할수 있는 일인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TDX는 이미 상용화한 실적이 있으며 그 기술의 원천이 연구소였다.

그리고 당시의 연구소는 제조업체나 운용업체의 교육훈련을 위해 절대적인
존재였다.

아울러 연구소가 개발한 시험생산기(TDX-1)는 설치후 얼마후에 철거했지만
AXE-10을 도입할 때 가격 협상력을 발휘했으며 양산기(TDX-1A) 역시 1백만
회선에서 생산을 중단했으나 KT 주도로 개발한 중용량기(TDX-1B)의 기반이
됐다.

1993년 9월, 체신부는 "전파통신기술개발 추진협의회"를 설치하고 나를
의장에 앉혔다.

협의회는 두개의 분과로 구성되었는데 하나는 KMT에 설치된 "이동통신기술
개발사업 관리단"이었으며 또 하나는 KT에 설치된 "위성방송기술 개발사업
관리실"이었다.

나는 이 두 분과를 함께 관장했다.

나는 우선 CDMA에 관한 문헌조사에 들어갔다.

KAIST 자료실에 의뢰해서 CDMA, Spread Spectrum관련 논문과 보고서 등을
검색해서 이동통신기술의 현황을 파악하는 한편 연구소와 국내 업체들이
외국 업체에서 매입한 기술자료의 목록을 입수해 CDMA의 상용화 가능성을
평가했다.

유감스럽게도 연구소와 제조업체들을 돌아보고난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공동개발을 한다는 사람들이 Rule of game이나 운용자와 합의된 규격도
없이 외국업체가 개발한 CDMA 시범장치(RTS)를 모방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장 먼저 서둘러 해야할 일은 CDMA의 원천기술을 보유한 외국업체
와 이를 끌어들인 연구소의 행적, 외국업체와 국내 제조업체간의 협약 등
사업의 실상을 파악하는 한편 KMT로 하여금 운용자로서 요구를 제시케 하고
정부당국에는 진실을 알려 사업의 향방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몇가지 사업 방침을 세웠다.

첫째 실현성이 없는 연구소 주도의 공동개발에서 업체간의 자율경쟁개발로
전환시킨다.

둘째 아날로그 방식이긴 하지만 이동통신시스템을 개발한 실적이 있는
삼성을 적극 참여시킨다.

셋째 외국업체와 연구소를 따르지 않고 독자 개발을 선언한 LG정보통신을
적극 지원한다.

넷째 연구소는 교환기 기술이 없는 현대를 적극 지원한다.

끝으로 연구소는 ASIC(주문형 반도체) 칩을 개발한다.

이런 방침을 세워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는 온갖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맹자의 방문을 받은 양혜왕이 "이익"이 되는 일이 있기를 바라자 맹자는
"이익도 좋지만 역시 인과 의가 있어야 한다(역유인의이기의)"고 했다.

이 말에 빗대어 말하면 정부가 리를 위해 인의 차원에서 TDX나 CDMA같은
사업을 개발했다면 그 성공을 위해 나는 의의 차원에서 사업을 관리해야
했다.

사실 시간과 돈을 다 써버린 시점에서 떠맡은 CDMA 사업은 나에게 모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인의 논리보다는 "잘라내야 할 생명은 잘라내야
한다"는 의의 논리를 강요했다.

의의 논리란 오곡백과가 싹이 터 자라는 봄 여름에 가지를 치고 벌레를
잡아주며 잡초를 뽑아줘야 가을 겨울에 풍요로운 수확을 누린다는 자연의
섭리임이 분명했지만 이를 실천하는 일은 인간적으로 정말 고통스러웠다.

1989년초, 정부는 "디지털이동통신 시스템개발"을 국책사업으로 선정하고
KT와 KMT의 출연금과 참여업체의 개발비 등 모두 수천억원 규모의 예산으로
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의욕적으로 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매사에 의욕이 있어야 하지만 의욕만으로 상용시스템이 개발되는
것은 아니다.

그 무렵 우리의 기술력은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 개발에는 기술과 경험이
따르지 못했으며 게다가 아날로그이동통신의 기술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을 개발한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무모한 일처럼
보였다.

선진국들도 이동통신시스템의 방식을 놓고 TDMA로 하느냐 CDMA로 하느냐
논란을 하던 시절임을 생각하면 의욕만 앞세운 무모한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두 기술은 같은 세대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즉 시장 점유율로 보아서는 유럽 지역에 GSM이 먼저 등장함으로써 TDMA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지만 이동통신의 발전방향은 주파수 자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FDMA에서 TDMA로, 그리고 다시 CDMA로 발전해가고
있음을 감안해야 했다.

실례로 미국의 경우 TDMA 이동통신 서비스가 열세를 보이자 CDMA방식으로
선회하는 사업자가 점차 늘어났으며 특히 프라임코는 개인휴대통신을 이미
IS-95에 기초를 둔 CDMA 방식으로 결정한 상태였다.

또한 CDMA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적합하기 때문에 일본의 NTT도 와이드
밴드 CDMA를 이용한 멀티미디어 이동통신의 시범을 하는 등 일본에서도
CDMA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GSM의 확산에는 기술적 우월성보다는 유럽지역내의 국가간 통신
방식의 단일 표준화라는 절실한 필요에 따른 유럽연합(EU)의 정책적 배려가
작용했다.

따라서 유럽은 디지털 방식이긴 하지만 아날로그 용량의 두배도 안되는
GSM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유럽의 실정은 당연히 우리 환경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시의 인구 과밀 현상 때문에 주파수 부족 현상이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게다가 유럽의 연구기관들조차 멀티미디어 무선통신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CDMA를 차세대 기술로 여겨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지
않을수 없었다.

무엇보다 CDMA 기술이 상용화에 성공하면 기술의 종속 상태에서 단숨에
기술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이에 1992년 12월3일, 체신부는 논란을 거듭하던 TDMA와 CDMA 중에서
여러 모로 이점이 많은 CDMA를 업계 표준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정부가 구미 제국에서 상용화되어 위험 부담이 적은 TDMA 방식을 제쳐놓고
미지의 기술인 CDMA를 차세대 이동통신 방식으로 결정한 배경에는 TDMA
기술의 제공을 거부당했던 당시의 사정과 CDMA가 가입자 수용 용량면에서
여타 방식보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 개발에 성공할 경우 기술 자립을 성취할
수 있다는 점을 크게 고려한 사실이 있다.

여하튼 CDMA기술을 확보하는 데는 연구소의 기여가 컸다.

1993년 6월, 체신부 윤동윤 장관은 이동전화 신규 사업자 선정에 새로운
방침을 발표했다.

국내에서 개발하고 있는 CDMA 방식 이동통신 시스템이 1995년 말에 상용화
되기 때문에 신규 사업자는 이를 채택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국산 CDMA 시스템이 1995년말
이전에 상용화돼야 했지만 연구소는 진도가 없는 사업 보고나 생산에 연결
되지 않는 시범만 계속하고 있었다.

연구소 내부에서조차 1995년말의 상용화를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가 하면 상용화에 앞장 설 제조업체들 역시 해 놓은 일이 별로
없었다.

상용화를 전제로 한 개발인 만큼 처음부터 업체간의 자율 경쟁에 맡기고
정부는 기술 표준만 정하면 됐을 것을 연구소가 주관한 것이 문제였다.

과거와 달리 시장 개방 압력이 거세지고 사업 환경이 독점에서 경쟁으로
바뀌고 업체들의 정보 기술 인력 관리 능력 등이 이미 연구소를 능가하고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선 안될 일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1995년말까지는 CDMA 시스템을 상용화해야 하는 것은
당위가 되었지만 당시의 상태로는 도저히 국산시스템으로 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 불투명해진 것이다.

만약 차질이 생겨 신규 사업자의 서비스 개시가 늦어지고 그로 인해 적체가
심화되거나 통상 마찰로 비화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은 차치하더라도 엄청난
투자의 낭비는 물론 장비 도입 과정에서의 불이익이나 외화 부담을 면하기
어려웠다.

이를 심각하게 생각한 정부는 다각도로 대책을 강구하던 끝에 TDX의 개발
사례를 되새기면서 그 사업에 앞장을 섰던 나에게 다시 한번 CDMA라는
고행의 길을 걷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TDX 개발보다 CDMA는 위험 부담이 훨씬 큰 개발 사업이었다.

번번이 극적인 결단을 내려야 되는 나의 입장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을 종종 되새기게 했다.

두 갈래 길 가운데 한 길을, 그것도 인적이 없는 외로운 길을 선택해야
했던 나는 그때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달라지는 충격에 계속 시달려야 했다.

연구 개발은 미지의 미지에 도전하는 험하고 외로운 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