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은 <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

가끔씩 TV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의 인물설정도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대개가 자기 주장이 아주 강한데다 가지고 있는 직업들도 디자이너
카피라이터 의사 변호사 기자등 모두 상당한 전문직종들이다.

그같은 직종에 입문해 제대로 인정받는것 하나만으로도 인생이 고달프고
바쁠터인데도 드라마속의 많은 여성들이 그 바쁜 와중에도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해낸다.

예를들면 직장에서 인정받고,사랑에도 성공하며,행복한 가정도 꾸려가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하며 살아가는 전업주부들은
거의 한결같이 회의에 빠진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내 인생이 이게 무언가,허무하다.

그런 대사를 읊으면서 우울증에 빠져가는 것이다.

여성의 수동적 모습,누구의 연인이나 아내,어머니의 역할로서만
등장했던 과거에 비한다면 나름대로 발전을 이룬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성 대부분의 직업이 주부인 이 사회에서 극소수의 탁월한
여성만이 이를수 있는 상황을 설정해놓고 마치 그것이 현대사회
여성의 보편적 모습인양 떠들어대는것도 진정한 발전은 아닐듯 싶다.

그안에 속하지 못한 많은 평범한 여성들이 자신의 평범을 자칫 못남으로
여겨 열등감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를 어느정도 키워놓은 젊은 주부들로부터 자주 듣게되는 말은
취직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물어본다.

어떤 일을 하고 싶으며,내세울만한 경력이나 특기가 무엇이냐고,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무조건 일을 하고 싶다고 호소하는 그들속에서
느끼게 되는것은 그저 아이만 키우며 살기가 뭔가 부족하다는 막연한
상실감이다.

내일을 찾고 싶어하고,누구의 아내로서가 아닌 자신의 이름 석자로
살고 싶어하는 욕망은 현대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된 욕심에 불과하다.

그리고 꼭 그 욕망을 성취해야만 성공한 인생도 아니다.

남성이건 여성이건간에 다 자기에게 적합한 자리가 있다.

살아가면서 겪는 숱한 경험들 성격 인생관 학문이나 기술. 그런
모든 것들이 합쳐져 자신의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마음에 들건,들지 않건 그것은 내가 만든 나의 자리이다.

좀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연장을 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길밖에
없다.

만약 나에게 그런 열성과 기술이 없다면 결국은 단 하나의 답만이
남게 된다.

지금의 내자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고통스럽고 불행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스스로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도 있다.

자기 나름대로의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의 주변에서 떠도는 말들은 한결같이 저 사람은 얼마나
힘이 들까,나 같으면 저렇게는 못살겠다등이다.

개인이 가진 특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우리사회에
팽배해 있다.

여성운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마땅한 자리에 오르는 것은
전적으로 환영할 일이지만 그렇게 살수 없는 여성들에게까지 그런
인생을 은연중 강요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서는 안될 일이다.

최첨단 전문직종에서 일하지 않아도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는 내일도
얼마든지 있다.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 봉사하는 일이야말로 내가 할수 있는 가장
큰 일이다.

사회는 과학기술이나 산업발전으로도 진보하지만 개개인의 행동
하나하나로 더 많이 진보한다.

그런 의미에서 화려함과 탁월함을 지향하는 우리의 대중매체들이
상업주의에서 벗어나 평범한 이들이 부담없이 수용할수 있는 그런
잔잔함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