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업을 경영하고 있어서가 아니라,한 나라의 경제 발전에는 민간
부문의 역할도 정부의 노력 못지 않게 중요하다.

국내 기술인력의 중동진출은 73년부터 시작됐다. 월남에서의 특수경기가
끝나가면서 중동시장에 눈을 돌리게 된 민간기업들의 개척정신에서 비롯
되었다고 할수 있다. 물론 정부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쿠웨이트등
주요 산유국에 중점을 두고 대중동유대 강화에 박차를 가해 중동 진출붐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아직 개척 단계여서 74년의 경우 중동진출인원은 약
4백명 정도에 불과했다. 중동진출이 본격화 단계에 접어든 것은 이른바
중동 붐이 일어났던 70년대 후반부터다. 75년에는 약 7천명이 중동
6개국에 진출했고 건설수주가 본격화된 이듬해에는 2만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나는 이 시점이 서울~중동 정기노선을 개설하는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한일개발 건설 현장을 돌아보면서 구상한 항공편
취항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75년말에는 그동안 4차례에 걸쳐 부정기편을 운항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우선 바레인 정부로부터 정기편및 부정기편의 임시 운항허가를 취득했다.
이와함께 중동 최대의 시장이던 사우디 취항을 위해 사우디 항공과 우선
공동운영에 대한 상무협정체결을 추진하는 한편 양국 정부간의 항공협정을
체결하도록 정부에 건의했다.

그러나 당장 중동 정기노선을 개설하는데는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왕복
27시간이 걸리는 장거리운항이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중간에 한 두 국가를
경유하는 중간직항노선을 개설할수밖에 없는데 이들 국가와의 이원권문제와
중간시장 수요를 흡수할수 없는 노선상의 애로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러한 장거리 신규노선 개설에 따르는 영업상의 문제등 각종의 위험부담도
있었다. 그러나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사소한 문제점으로
망설일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우선 판매기반이 전혀 없는 중동지역 주변시장을 개발하기 위한 거점 확보
를 위해 조사단을 파견했다. 기초조사를 마친후 사우디 이란 쿠웨이트
시리아등 중동 10개국에 총판매 대리점을 지정했다.

아울러 76년3월 "대한항공의 현황과 중동 관련노선 확장계획"을 정부에
제출하여 노선 주변국가와의 항공협정체결을 요청했다. 내부적으로는 중동
정기노선 개설방침을 확정하고 중동지역의 영업 전초기지를 구축하기 위한
일환으로 바레인에 첫 영업소를 개설했다.

이 과정에서 바레인정부의 허가에따라 76년1월말부터 5월까지 바레인노선
부정기운항을 계속해 14회에 걸쳐 3천여명의 인력과 적잖은 화물을 수송
하는 값진 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준비끝에 76년5월,움라지 고속도로 건설현장에서 결심을 굳히고
그동안 닦아온 기반을 바탕으로 서울~바레인을 연결하는 최초의 정기여객
노선을 정식으로 개설하였다. 이 노선을 2개월뒤에는 스위스의 취리히까지
연장하여 남회구주로선을 형성했다. 서울~파리간의 북극 노선과 함께 한국
과 유럽을 원으로 연결하는 환상의 남북항공로선을 이루게 되었다.

중동 최대의 산유국이며 최대 항공시장이었던 사우디 아라비아에 노선을
개설한 것은 77년4월이다. 자신들의 얘기가 곧 법으로 통하는 사람들과
협상이 쉽게 진행될수 없었다. 냉담한 반응을 누그러 뜨리며 대한항공의
취항에 따른 로열티 문제등 숱한 밀고 당기기 끝에 먼저 지다에 운항을
개시했다.

지다 취항 2주일후에는 다란에도 직항노선을 개설했다. 항공협정상
대한항공은 사우디의 1개 지점을 취항지로 선택할수 밖에 없어 지다를
택했으나 사우디항공과 공동운영 형태로 운항키로 상무협정을 맺은 뒤
다란에 임시 취항하기로 협의하여 개설한 것이다.

바레인과 사우디에 이어 78년7월 쿠웨이트에도 정기 여객노선을 개설했다.
이라크 이란 요르단 지역의 기술 인력 진출이 점증함에 따라 활기를 띠기
시작해 취항 직후부터 대형 기종으로 대체해 운항할 정도였다. 바야흐로
중동붐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렇게 취항지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많은
임직원들이 열사의 땅에서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며 노고를 아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특히 요르단왕국의 대한항공 총판매 대리점 부사장이던 에밀
코로씨등,친교를 맺은 인사들의 도움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