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경제관계에 위상재정립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을 불황의 늪에 빠뜨리고 있는 엔고가 한국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업종은 30년가까이 정상을 지켜온 일본을 제치고 조선수주 세계1위
자리에 올라섰고 자동차업종도 수출이 급격히 회복되고 있다. 전자 반도체
등 여타업종의 경우도 미국등 해외시장에서의 가격경쟁력이 크게 향상되고
있다.

일본기업들이 한국업체를 보는 시각도 변하고 있다. 한국기업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는 것은 물론 예전에 없이 협력을 요청하기도 하고 양국기업이
손잡고 제3국시장에 진출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기회를 활용하기 따라서는 한국의 산업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고
양국경제관계를 재정립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일간의 위상변화가 가장 뚜렷한 것은 조선분야다. 엔고의 영향으로
일본조선업체에의 선박발주는 눈에 띠게 줄어드는 대신 한국으로의 주문이
급격히 늘었다. 심지어는 일본선주들도 한국기업들에 선박을 주문하는 경향
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에 만해도 4개업체가 국내업체에 5척의 선박을
발주했다. 일본우선은 삼성중공업에 소화해운 나빅스사 천기기선은
현대중공업에 벌크선1~2척씩을 각각 발주했다. 마루베니는 유조선1척을
대우조선에 발주했다.

한국조선업의 경쟁력이 일본내에서조차도 인정되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웬만하면 일본기업들에 발주하는 관례를 갖고 있는 일본업체들도
해외발주란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는 더이상 엔고를 견뎌내기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자동차업종의 경우도 엔고의 혜택은 크다. 일본자동차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국차는 지난해 수출액이 60%나 신장했다.
올해도 20%가량의 신장세를 유지,자동차수출액이 처음으로 50억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전자 기계등 여타분야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전자는
지난해 13% 기계는 23%의 수출증가율을 각각 나타내 전년신장률의
2~3배씩에 달했다.

일본의 실적부진과 한국기업들의 상대적 경쟁력강화는 대일경제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기업들이 한국기업을 인정하기 시작하고 협력을
요청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한일기업들이 손을 잡고 제3국시장에서 공동전선을 펼치는
것이다. 미쓰이조선은 지난해말 현대건설과 공동으로 태국남부에 건설되는
비료공장건설플랜트의 수주내정을 받았다. 2백50억엔규모에 이르는 이공사는
미쓰이측이 플랜트의 주요부분을,현대측이 토목및 부대시설공사를 각각 담당
키로 했다.

96년 완공예정인 이플랜트는 화학비료를 연1백만톤 생산할 수 있는 대형
시설로 수주비율은 미쓰이가 4할 현대측이 6할이다. 양사는 가격경쟁력과
기술경쟁력을 결합,독일등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구미의 엔지니어링업체가 한국기업과 연합한 경우는 많았지만 일본의
엔지니어링업계가 한국과 공동수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미쓰비시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은 홍콩의 OOCL그룹이 발주하는 5척의
컨테이너선입찰에 공동으로 참가, 오는 2월중순경 결정될 최종낙찰자선정
에서 수주를 따낼 것이 유력시되고 있다. 여기서는 삼성중공업이 건설을,
미쓰비시측은 기술제공및 자금조달을 각각 맡기로 했다.

양국기업간 협력이 증대되고 있는 것은 일본기업으로서도 한국기업의
협조를 얻어야 할 필요성이 커졌음을 뜻한다. 한국기업의 위상강화는
일본내에서도 확인할 수있다.

삼성전자저팬의 방상원과장은 "최근엔 우리회사가 일본반도체업체들로부터
나카마(동료)로 대접받고 있다"고 밝힌다. 나카마란 일본업체들사이에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기술정보교환등을 통해 상호이익을 도모하는
관계를 말한다. 나카마기업들은 제품설계단계부터 같이 참여하기도 한다.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분야에서 세계1위업체로 부상한 점이 일본업체
들로부터 인정받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자동차업계에서도 위상향상은 뚜렷하다. 기아자동차 히로시마지사의
이문식 지사장은 "제휴선인 마스다측이 예전에는 어디까지나 한수
가르쳐준다는 태도였으나 요즘은 거의 대등한 입장에서 대우를 해준다"고
밝힌다. 기술수준은 아직도 상당히 뒤지는 게 사실이지만 가격경쟁력이
높아진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측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
자동차업체들에게 OEM(주문자부착상표)으로라도 차를 납품해달라고
요청하는 형편이 됐다. 마쓰다의 경우는 기아자동차에 판매를 요청하고
있고 혼다도 대우측에 OEM납품의사를 타진하고 있다. 자체생산분만으로는
채산을 맞출수 없게 된 점이 배경에 깔려 있다. 내수및 수출호황으로
물량대기가 바쁜 국내업체들이 오히려 배짱을 내보이는 상황이다.

조선업계역시 비슷하다. 삼성중공업 현대정공등의 대형업체는 물론
중소업체들에까지도 일본기업으로부터 해치커버 압연설비 선미부품등의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 제조단가를 떨어뜨리기 위한 고육책이다.

마쓰다자동차의 노부도부사장이나 미쓰이조선의 모토야마지바공장장등이
모두 한국과의 협력강화 필요성이 크게 증대됐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있다.

최근의 엔고가 한국에 또한번 도약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마침
세계경기도 회복기미를 보이고 있어 경우에 따라선 80년대말의 호황이
재현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번의 기회는 호황을 누린다는 단순한 차원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우리의 강점을 최대한 살려 산업구조자체를 보다 고도화
선진화하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 핵심과제의 하나인 한일간 수평
협력관계도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