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10월26일 저녁7시 궁정동에서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한 그
시간 나는 아무것도 모른채 중소기업국제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중소기협
중앙회 김봉재회장 학계대표들과 함께 독일행 KAL비행기를 타고있었다.

베를린에 도착해 총영사의 영접을 받고 박대통령 서거소식을 들었다.
본국과 연락을 취한 결과 외무부훈령에 따르라고 해 회의에 참석하고
5일후에 귀국했다.

그후 최규하총리가 대통령에 취임했고 곧이어 12.12사태가 발생했으며
5.18광주사태등 국내정치가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경제는 침체국면에
빠져들었다.

총통화는 35%이상 급팽창 하던것이 17.7%로 안정기조를 유지한 반면
석유값과 그동안 행정력으로 억제됐던 공공요금및 공산품 가격이 현실화돼
물가가 80년에는 39%나 폭등,과거의 과잉공급된 통화량까지 흡수해버렸다.

물가상승률은 39%인데 총통화증가율은 17.7%에 그쳐 GNP가 사상처음으로
5% 감소했다. 과거에 과잉 공급된 통화가 부동산값 폭등,물가폭등으로
흡수돼 수입증가율은 9.6%로 둔화됐으나 연40%씩 증가하던 수출이 16.3%로
그 증가세가 약화되면서 국제수지는 53억달러의 적자를 보이는등 경제는
우려할만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문에 정부는 80년1월12일 환율을 달러당 4백84원에서 5백80원으로
다소 현실화함으로써 수출기업의 채산성이 향상되도록 했으나 금리를
대폭인상,기업은 금리부담에 시달렸다. 대출금리는 19%에서 26%로,1년만기
정기예금은 18%에서 24%로 올랐다.

그해 5월21일에는 박충훈국무총리 김원기부총리 이승윤재무장관이 새로
취임했다. 김부총리는 나를 전무임기만료때 중임시켜준 분이고 이장관은
케냐의 나이로비에도 같이 갔던 친분이 있어 이들의 입각을 기뻐했다.
5월31일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가 신설되고 7월초부터 공무원 숙정이
시작됐다.

나는 7월30일 중소기업은행장으로 승진했고 한국은행 이사였던 임재수씨는
조흥은행장,정영모씨는 주택은행장이 돼 한국은행출신이 대거 은행장으로
진출하게 됐다.

신병현총재도 상공부장관으로 발탁되었으니 한국은행의 위상이 전에 없이
높아졌다.

나는 이승윤재무장관을 찾아가 기업의 자금부담을 경감시키는 건의부터
했다. 5개월전에 대출해준 기업이 또 와서 대출을 요구하기에 "생산도
늘리지 않고있는데 왜 또 대출을 받아가려 하느냐"고 물었더니 "원유값
인상으로 각종 원료값이 함께 오른데다 금리마저 대폭인상돼 추가적인
금리부담과 기업적금을 지난번 융자금으로 충당했으니 융자 받은 돈을
고스란히 은행에 도로 갖다준 꼴"이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기업의 실상을 예로들며 "꺾기"로 은행에 묶어둔 예금부터 대출과
상계,기업의 자금수요를 줄이고 은행대출이 생산자금으로 직접 흐르도록
해야한다고 이재무장관에게 역설했다.

그뒤 이장관은 즉시 최규하대통령과 전두환국보위위원장의 재가를 받아
현금과 대출을 상계처리하도록 각은행에 지시했다.

물론 예.대상계를 하면 예금과 대출계수가 감소하기 때문에 은행은 이를
반대했다.

이때 이장관으로부터 "박행장이 배정된 한도보다 두배로 상계해서 모범을
보여달라"는 부탁을 받고 솔선수범했다.

나는 예.대상계 만으로는 기업의 자금부담을 줄이수 없고 은행들의 분식
상계로 실효가 없다는 것을 느껴 다시 이장관에게 기업자금을 전면 폐지
하도록 건의했다. 이장관은 8월27일 새로 취임한 전두환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10월초 기업자금제도를 철폐하고 적금예금과 적금대출은 상계처리토록
했다. 이때 폐지된 기업적금이 내가 한은 총재직을 사임한 1988년부터 또
다시 허용됨으로써 꺾기가 또 성행하게 된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