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개의 봉우리를 끼고 흐르는 모레인 호수.
여덟 개의 봉우리를 끼고 흐르는 모레인 호수.
캐나다 로키산맥은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사진) 때문에 마음에 품게 됐다. 영화에서는 1963년 와이오밍으로 밝히고 있지만 실제로 영화가 촬영된 곳은 캐나다 앨버타주의 캔모어와 카나나스키다. 이안 감독은 왜 미국 서부를 캐나다 로키산맥에서 촬영했을까?

[여행의 향기] '브로크백 마운틴'의 무대…로키산맥서 자유를 외치다
사실 브로크백이란 곳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산이다. 감독은 서부극 속 개척과 정복의 이미지보다 감히 문명이 범접할 수 없는 장엄한 신화적인 공간을 원했다. 영화 속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은 우리 마음속 깊이 존재하는 모든 금기를 깨버리고 자신의 본능대로 살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에니스와 잭 두 카우보이가 몸과 마음을 섞은 장소이기도 하다.

밴쿠버에서 출발해 캠루프스를 지나 북쪽으로 124㎞ 정도 올라가면 로키산맥의 시작을 알리는 폭포를 만난다. 일종의 로키산 맛보기라고 할까. 하나는 웰스그레이주립공원 안의 클리어워터라는 동네의 스파햇츠 폭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재스퍼국립공원 내에 있는 아사바스카 폭포다. 물론 규모는 나이아가라 폭포보다 턱없이 작지만, 아사바스카 폭포는 물줄기가 장엄하게 흘러 내려와 보는 이들의 시름을 한 방에 날려준다.

밴프에서 재스퍼로 가는 아이스필드 파크웨이는 멜버른 근처에 있는 그레이트 오션로드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속도로로 이름이 높다. 200㎞가 넘는 아이스필드 파크웨이에는 산양과 무스 사슴 등 온갖 야생 동물이 산등성이를 따라 출몰한다. 동물을 구경하면서 아사바스카 폭포의 발원지에 해당하는 콜롬비아 대빙원의 아사바스카 빙하로 향한다. 운전하면서 계속해서 브로크백 마운틴의 OST를 들었다. 아르헨티나 출신 구스타보 산타올랄라가 작곡한 기타 소리가 청명한 로키의 풍광과 기가 막히게 떨어진다.

밴프 도심.
밴프 도심.
빙원은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얼음이 쌓여 있는 곳이다. 빙원을 바라보면 한 방울의 물이 모여 거대한 얼음 평원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가 확산되면서 모든 빙하가 매년 급속히 녹고 있고 아사바스카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구 초입은 이제 얼음이 아니라 거대한 황톳빛 벌판이다. 사실 육지 빙하, 바다 빙하, 산 빙하를 알래스카에서 모두 본 뒤여서 아사바스카 빙하가 새롭지는 않았다. 엄청난 크기의 바퀴가 달린 설상차로 빙하 위를 달린다. 마침내 세상이 모두 하얀 빛으로 부서지는 빙하 위에 도달한다.

빙하를 지나 페이토 호수로 향했다. 페이토 호수는 1900년 초에 로키지역 가이드로 활동했던 페이토가 자신의 이름을 붙인 데서 유래했으며, 칼든산과 패터슨산 사이에 길다랗게 놓여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호수의 빛깔은 마치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생생한 푸른색을 띠고 있다. 호수 주변이 까마귀 발처럼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까마귀 발 호수’라고도 불리는데 사실은 톰슨산의 빙하가 녹고 여기에 석회질이 섞이면서 독특한 빛깔을 내는 것이다.

아이스필드 파크웨이에서 만난 무스.
아이스필드 파크웨이에서 만난 무스.
로키산맥에는 페이토 호수 외에도 수많은 호수가 산재해 있다. 멀린 호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빙하호이고 배를 타고 섬에 갈 수 있을 정도로 광대하다. 바우 호수와 모레인 호수는 페이토 호수처럼 파란 물빛을 자랑한다. 특히 여덟 개의 봉우리를 끼고 흐르는 모레인 호수는 로키산맥이 숨겨놓은 또 하나의 보석이라 할 수 있다.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곡에 등장해 유명해진 루이즈 호수는 에메랄드 수만개가 잠겨 있는 것처럼 압도적인 푸른색을 띠고 있다.

로키산맥으로 가는 도중 중간 도시인 밴프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곳 역시 브로크백 마운틴의 촬영 장소다. 그림 엽서 같은 아담하고 예쁜 도시인데, 영화 탓인지 내게는 영화 속 주인공인 애니스가 잭과 이별한 뒤 메마른 길목 어디선가 구토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애니스는 죽은 잭이 겹쳐서 보관한 두 사람의 옷을 발견한다.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는 사내는 사랑하는 이의 옷을 가슴에 품고 중얼거린다. “맹세해(I swear…).” 그는 과연 무엇을 맹세했을까? 신에게 추방될지라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 밴프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