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앞으로 복지가 큰 이슈가 될 것 같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 먼저 복지를 들고 나오더니,정부도 최근 5세 이상 의무교육을 제도화함으로써 그에 합류하는 모습이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엇보다 선진국의 '복지국가' 경험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지금 복지국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근로의욕 상실과 재정 파탄을 떠올리게 되지만,실제로 복지국가는 장점이 많다. 우선 안정성이다. 시장경제는 불황과 호황이 반복되는 경기변동을 피할 수 없는데,복지지출과 그를 뒷받침하는 누진세 제도는 불황 때는 경기를 부양하고 호황 때는 식혀주는 '자동안정장치' 역할을 한다.

복지제도가 잘되어 있으면 거시경제정책을 더 장기적 관점에서 시행할 수 있다. 예컨대 경기회복 국면에는 고용이 생산보다 늦게 늘게 마련인데,복지제도는 고용이 늘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게 해 준다.

지금 독일 같은 나라가 경기 회복을 지켜볼 여유가 있는 반면,미국이 그렇지 못한 것도 복지제도의 차이가 한 원인이다. 미국이 '양적 완화' 통화정책을 쓰게 된 데는 복지제도의 미비라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은 '환율전쟁'을 유발하고,달러의 국제적 지위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복지국가의 또 하나 장점은 구조조정이 쉽다는 것이다. 구조조정으로 근로자가 직장을 옮기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불안'을 의미한다. 복지제도는 그 불안을 덜어줌으로써 구조조정을 쉽게 만들어 준다. 따라서 복지제도는 구조조정을 수반하게 마련인 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펼 수 있는 바탕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덴마크나 핀란드 같은 북구(北歐)의 복지국가가 가장 개방된 경제라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기초생활보장이나 교육 의료 지원은 경제 전체의 생산 잠재력을 올리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정부의 복지 지출은 그 재원이 되는 누진세 제도와 함께 소득분배를 교정해 준다. 평등한 소득분배는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고 그 구성원의 행복감을 올린다.

물론 이런 장점이 근로의욕 저하와 재정파탄이라는 복지국가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들은 복지를 늘리더라도 근로의욕을 저하시키지 않도록 여러 가지 방안을 고안해 왔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재정 건전성 문제다. 복지국가가 대규모 재정적자로 이어질 경우 그것은 성장을 저해하고 결국 복지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재정적자는 이자율 상승을 유발해 투자를 저해한다. 재정적자로 국가채무가 쌓이면 지난 10여년간 일본에서 보는 것처럼 경기가 나빠져도 부양책을 펴기 어려워지고,금융위기가 일어나도 대처할 능력이 떨어진다. 쌓인 국가채무를 인플레이션으로 해결할 가능성 때문에 나타나는 불확실성이 경제성장에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국가채무를 견디다 못해 재정적자를 줄일 때는 지금 그리스에서처럼 꼭 필요한 지출도 삭감되고,그 과정에서 진짜 어려운 사람이 희생될 수 있다.

결국 선진국의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복지국가는 장점이 많지만,재정을 건전하게 운영하는 경우에만 그렇다는 것이다. '진짜' 선진국은 바로 그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 복지제도가 미비한 한국이 선진국에서 나타난 복지국가의 폐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그 장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기존 재정상태도 건전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상태에서 복지를 확대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 재정의 건전성 확보 방안이다. 그런 방안 없이 복지 깃발을 흔드는 것은 정치의 계절에 표나 얻으려는 책략이라는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제민 < 연세대 교수·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