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jkj@hankyung.com >

정말 엉뚱하다.

대통령이 세 번씩이나 유감을 표명한 것도 그렇고 '기사 앞에 검은 리본을 단다'며 법석을 떨고 있는 언론도 그렇다.

미국을 악마시해왔던 그동안의 중독 증세가 불의의 일격을 받은 결과다.

스스로를 피해집단화하는 데만 골몰해왔던 상황의 반전이 초래한 당혹감이다.

역사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하는 버릇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가혹한 시련을 안기는 외부의 적을 설정하는 것도 상투적 수법이다.

정치 현장에서의 대중선동 자체가 그런 과정의 증폭이다.

'일본의 식민 침탈'이라는 한마디만 걸치면 모든 후진적 오류들과 실책들이 일순 명료해지고 만다.

심지어 경제학자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근 100년을 설명하는 복잡한 인과 관계는 증거와 사실보다는 신화적 덧칠만 잘하면 된다. 대통령의 서가에도 꽂혀 있다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들은 그런 교리의 핸드북이다.

외부의 가해자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언제나 정의의 편이 되고 정치 세력화할 수 있다.

그 대상이 최근 들어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 나라는 착하고 순수하며 도덕적일 뿐더러 정의가 흘러넘치고 게다가 깨끗하기까지 한 민족의 터전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이름의 악당이 등장하면서 고달프고 험악하며 살벌하고 더러운 곳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면 충분하다.

"귀신 들었다"는 한마디면 모든 질병에 대한 이해와 치료가 가능한 주술과 다를 것이 없다.

미국을 비난하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세상이 고달픈 모든 이유를 그것에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경제 현실의 고단함과 삶의 난해함 따위를 얼버무리는 데도 그만이다.

좌파학자들과 참여정부의 주술적 반미주의를 빼면 과연 그들의 철학에서 무엇이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현실이 고달픈 것은 우리를 이 지경으로 밀어넣는 외부의 거대한 음모 때문이다.

한·미 FTA 반대 운동도 그런 캠페인의 하나다.

과학은 없고 종교만 맹위를 떨치는 21세기 한국이다.

개명천지에 삼보일배가 성행하는 것도 주술적 세계관의 자연스런 산물이다.

저잣거리로 내려서면 더욱 그렇다.

인구에 회자한 영화 중에 반미주의를 제외하면 과연 몇개 영화나 성히 살아남을까 궁금하다.

'남북 군인들만으로는 화해'라는 식의 JSA에서부터 동막골을 거쳐 미군이 한강에 흘려 보낸 독극물의 결과로 태어났다는 괴물에 이르기까지 악당은 모조리 미국과 미군,외세라는 등식이다.

이제는 그것이 정상으로 비쳐질 정도다.

미국은 총 든 양키요 가해자다.

하얀 치마저고리의 동막골 처녀 한국인은 고달픈 피해자라는 이미지가 천연덕스럽게 만들어져 왔다.

바로 그 때문에 모 신문은 미국에서 광기의 총기난사 사건이 터졌다는 뉴스를 듣자마자 미국을 모욕하고 비아냥대는 만화를 아무 거리낌없이 그렸던 것이다.

그것이 또 하나의 광기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2002월드컵 당시의 광적인 응원 열기가 그렇고 수만 인파가 모여들었던 장엄한 촛불시위도 그랬다.

바로 참여정부의 정치 에너지다.

물론 정치만 탓할 것도 없다.

동남아에 쓰나미가 터지면 한국인 피해자의 존재만을 궁금해하는 이상한 나라다.

태풍이 한반도가 아닌 일본으로 비껴가면 "정말 다행"이라는 식으로 보도하는 방송사들이다.

같은 상황에서 "한국에 피해가 없기를 바란다"고 멘트하는 일본과도 격이 다르다.

인류는 없고 '우리 종족'만이 존재하는 그런 한국이다.

조승희라는 이름 석자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집단 의식은 그것의 누적된 결과다.

재일교포의 차별을 문제삼지만 정작 자기 안의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못 본 체하고, 인권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북한의 인권 파괴는 외면하는 위선적 사회다.

한국인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인 풋볼 선수의 성공에 열광하는 종족 국가다.

친북이 반드시 반미와 동행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여당 인사들이 또 줄지어 북한을 간다고 한다.

얄팍한 종족 의식에 기대어 보자는 정치 술책이다.

한국인은 과연 종족의 동굴을 빠져 나와 보편의 세계로 나아갈 것인지, 언제쯤이면 달빛에 바랜 신화에서 태양 아래 역사 시대로 나아갈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