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오렌지, 1899, 오르세미술관
사과와 오렌지, 1899, 오르세미술관
“기분 나빠하진 말게. 자네는 우유부단하네. 그런 점 때문에 성공하지 못할 거야."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하지만, 정말 기분 나쁜 얘기입니다. 심지어 이 말을 30년 단짝 친구에게 듣게 된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화가 폴 세잔(1839~1906)은 소설가 에밀 졸라에게 이런 혹평을 들었습니다. 세잔과 졸라는 서로 힘들 때마다 의지했던 오랜 단짝이었습니다. 졸라의 얘기가 세잔을 채찍질하기 위한 취지였다고 좋게 해석하더라도, 너무 냉정한 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졸라는 1886년 소설 <작품>에 세잔을 닮은 한 인물을 넣었는데요. 능력은 있으나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화가 클로드라는 캐릭터죠.

세잔은 이를 졸라가 바라본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졸라와의 30년 우정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폴 세잔의 자화상, 1875~1877, 노이어 피나코테크
폴 세잔의 자화상, 1875~1877, 노이어 피나코테크
졸라는 오랜 시간 세잔을 지켜봤던 만큼 나름 그를 잘 알았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졸라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세잔은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미술사에 길이 남았습니다. 피카소도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칭송했죠.

친구에게조차 비관적인 예언을 들었던 세잔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이 한 마디면 모든 게 설명이 됩니다.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사과를 그리는 건 꽤 단순해 보입니다. 그것만으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니,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놀랍게도 실제 세잔은 사과로 파리, 나아가 미술계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세잔은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가야 했죠.

그러다 그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무료로 강의를 해주는 시립 미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엔 굳은 결심을 하고, 가족들에게 화가가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세잔은 미술을 배우기 위해 파리로 향했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가 된 졸라도 당시엔 그의 꿈을 응원했습니다.
졸라의 집, 1880, 글래스고 바렐 컬렉션
졸라의 집, 1880, 글래스고 바렐 컬렉션
하지만 세잔은 5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무료로 미술 수업을 들은 게 전부였던 그에게 파리에 모여든 천재 화가들의 벽은 너무 높았습니다. 민감하고 소심한 성격의 세잔은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고 크게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오랜 시간 품었던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은행에 들어가 일을 배우던 중 꿈을 포기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세잔은 다시 파리로 향했습니다. 이번엔 홀로 미술관과 박물관 등을 돌아다니며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데 열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습니다. 그들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데 그쳤죠.

그러던 중 세잔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게 됐습니다. 많은 화가들의 존경을 받던 인상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입니다.

피사로는 세잔의 시선이 자연으로 향하도록 안내했습니다. "자연을 성실하게 관찰하고 느낌을 그려라. 대담해지고 전체를 봐라." 세잔은 그와 함께 다니며 빛의 변화에 따라 자연을 화폭에 담는 법을 배우게 됐습니다.

세잔은 초상화를 그릴 때면 모델에게 150번 넘게 자세를 교정하도록 했을 정도로 까다로운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피사로는 그런 세잔을 품고 다독였습니다.

피사로는 졸라와 다른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세잔은 항상 나의 기대를 뛰어넘는다. 훗날 위대한 예술가가 될 것이다." 원석을 알아본 스승의 가르침 덕분에 그는 화가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사로의 예언이 실현되는 데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56세에 이르러서야 첫 개인전을 열게 됐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이전까진 졸라의 말이 현실이 된 것처럼 온갖 조롱에 시달릴 뿐이었습니다. "데생도 제대로 못한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그림을 사려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외면당했습니다.
생트 빅투아르 산, 1904, 필라델피아미술관
생트 빅투아르 산, 1904, 필라델피아미술관
어려움을 겪던 세잔은 38세에 파리를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파리에서 벗어나면서 인상주의와도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온전히 자신만의 화풍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인상주의와는 다른 성향의 '후기 인상주의'의 길을 가게 된 것이죠.

인상주의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에 따라 달라지는 찰나의 모습과 색을 빠르게 담아내는 것이죠.

세잔이 선택한 방법은 다릅니다. 인상주의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사물을 바라보는 건 비슷합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 자체를 담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를 위해 시간의 흐름과 시점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사물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그 모습을 모두 한 화폭에 그렸습니다.

세잔의 대표작 '사과와 오렌지'는 무려 6년에 걸쳐 완성한 그림입니다. 이 기나긴 시간 동안 그는 시점, 각도를 달리해 사과와 오렌지를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과는 위에서, 어떤 사과는 아래에서 바라보며 그렸습니다. 좌우로도 방향을 달리해서 담았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사과의 색깔도 조금씩 다른 걸 알 수 있는데요. 맛있게 잘 익은 빨간 사과부터 어느 순간 푸석해진 사과, 오래 지나 썩기 시작한 사과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과의 색 변화를 표현한 겁니다. '사과와 오렌지'란 하나의 작품에 사과의 모든 것, 이를 관통하는 본질을 담아냈다니 놀랍습니다.
생트 빅투아르 산, 1887~1890, 오르세미술관
생트 빅투아르 산, 1887~1890, 오르세미술관
세잔은 사과만이 아니라 고향의 아름다운 산에도 매료됐는데요. 그래서 80여 점에 달하는 '생트 빅투아르 산'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과를 그린 것과 동일한 방식입니다. 시간과 빛의 변화에 따라 산의 색이 달리 보이는 것을 담아내는 것은 물론 다양한 색채로 원근감까지 살렸습니다.

그렇게 세잔은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견고하고 영원한 인상주의를 만들고 싶다"라고 했던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 같습니다.

세잔뿐 아니라 고흐, 고갱 등도 후기 인상주의에 속하는데요. 이들은 훗날 야수파, 입체파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덕분에 세잔은 '근대 회화의 아버지'란 타이틀을 얻게 됐죠.

은둔자이자 외골수 화가가 마침내 이뤄낸 승리. 세잔은 30년 절친으로부터도 혹평을 들었을 만큼 분명 더디고 느렸습니다. 그 고집이 스스로를 해치기도 했죠.

그가 67세에 세상을 떠난 것도 그림을 그리다 일어난 일 때문이었습니다. 야외에서 작업을 하다 비바람을 맞고 폐렴에 걸린 겁니다. 하지만 이런 극한의 몰입이 있었기에,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