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받는 정치인과 혁명가, 상처 받은 문인과 예술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던 `망명자의 천국' 스위스가 달라지고 있다. 스위스 정부가 인권이 존중되고 있다고 판단되는 40개국가를 대거 선정, 이들 국가에서 오는 난민에 대해서는 지난 1일부터 망명 신청 자체를 기각키로 했기 때문이다. 망명자에게 스위스라는 '천국의 문'은 전보다 좁아진 셈이다. 망명신청 기준상 '안전' 국가로 분류돼 심사에서 아예 제외되는 국가들은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그리고 내년부터 유럽연합(EU)에 가입키로 된 동유럽 10개국, 세네갈 등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과 인도, 몽골 등이 포함돼 있다. 스위스 연방난민국은 이번 조치는 해당국의 인권 및 국제협약 존중 여부를 기준으로 분류한 것으로, 향후 망명 수용절차가 가속화돼 가부 결정은 이틀 정도로 크게단축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망명요청이 기각될 경우라도 당장 송환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마피아로부터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조국에서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경우, 망명 신청자가 강간을당한 여성일 경우에는 일시 체류를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 난민국의 해명이다. 스위스 정부 당국의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망명을 신청한 사람들은 모두 2만6천125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11%인 3천명 정도가 이른바 '안전'국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스위스의 난민 관련 NGO들은 소위 '안전'국가 리스트가 현실을 제대로반영하지 못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보스니아나 마케도니아 같은 국가는 누가 보더라도 결코 안전국가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다. EU가입 예정국가들을 무더기로 리스트에 집어넣은 것은 루마니아와 같은 일부동구권 국가 주민들이 프랑스를 통해 대거 불법 입국하는 것을 막기 위한 속셈으로풀이된다는 것이 언론들은 해석하고 있다. 정치관측통들은 스위스가 이번 조치를 취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10년간 국내 거주 외국인이 급증하고 있는데 따른 주민들의 불만, 그리고 이에편승한 정치권의 선전공세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위스의 전체 인구는 730만명. 이 가운데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90년 당시16.4%였으며 해마다 늘어나 현재는 5명당 1명이 외국인이다. 지난 2002년 기준 외국인 비율은 19.4%로, 인접한 독일의 9%, 프랑스의 1.6%,영국의 3.8%에 비하면 대단히 높은 수준이다. 이처럼 외국인 비율이 높아지자 주민들 사이에도 불만과 반 외국인 정서가 확대되는 분위기다. 문제는 극우 성향의 정당인 스위스국민당은 이런 정서를 부채질하면서 보수층유권자층에서 득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는 10월 19일의 총선을 앞두고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국민당은 25%의 지지를획득, 지난 3월 여론조사(24.6%)에 이어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이는 연립정권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민당(24%)과 급진당(20%), 기민당(13%)을 모두 앞선 것이다. 국민당과 사민당, 급진당, 기민당은 지난 44년간 연정을 구성해 집권을 계속하고 있지만 국민당이 10월 총선에서 원내 제1당으로 부상, 각료직을 늘리게 되면 연정내 정당간 균형은 무너지고 보수적 색채는 더욱 강화될 전망. 스위스국민당은 유엔가입이 전통적인 중립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며 반대입장을 취한 바 있고 직장여성의 출산 및 육아를 위한 모성호보법 확대적용에도 제동을거는가 하면 정부에 망명규제를 강요하는 등 극우적 색채를 강화하고 있다. 이 정당은 유럽연합 가입도 반대했고 돈세탁의 온상으로 지탄받고 있는 스위스의 은행비밀법도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스위스국민당을 이끌고 있는 억만장자 크리스토프 블로허(63)는 지난 10년간 국민당의 지지율을 2배 가까이 끌어올려 당내의 신망이 두텁다. 그는 프랑스 국민전선의 장 마리 르펜과 유사한 성향의 정치인. 1일부터 본격적인 총선 유세에 나선 그는 지난 해 스위스의 범죄율은 20년만의 최고 수준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을 예로 들면서 "우리 정부는 점점 외국인의 이해에 굴복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민당은 유럽연합에 가입하게 되면 새로 들어오는 동유럽 국가들을 위해 돈을 대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자리 축소를 의식한 노동계도 은근히 국민당의 이런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듯한 낌새다. 우려할만 것은 국민당의 지지기반이 점차 확대되자 급진당과 기민당등 제3,제4정당이 위기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정당도 반외국인 정서가 부각되자 최근들어 이민.망명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네바=연합뉴스) 문정식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