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한 50~60대가 대거 일용직에 몰리면서 새벽 인력시장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지난 20일 서울 남구로역 일대 도로가 건설 일용직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인혁 기자
은퇴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한 50~60대가 대거 일용직에 몰리면서 새벽 인력시장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지난 20일 서울 남구로역 일대 도로가 건설 일용직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인혁 기자
“이번 정류장은 남구로역입니다.”

“삐~”

지난 20일 새벽 4시30분 5615번 버스가 서울 남구로역으로 다가섰다. 조용하던 버스 안이 부산스러워졌다. 꾸벅꾸벅 졸던 50~60대 남성 10여 명이 짐을 챙기며 하차 준비를 했다. 모두 일감을 찾아 남구로역으로 ‘출근’하는 일용직 근로자다. 이미 수천 명의 중·노년 근로자가 남구로역에 운집해 있었다. 모두가 잠든 겨울 새벽 수도권 최대 건설 인력시장인 남구로역 앞 공터는 인파들의 하얀 입김으로 가득했다.

최근 남구로역에 ‘뉴페이스(새로운 사람)’가 늘었다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공통된 얘기다. 은퇴한 고령자들이 생계를 위해 속속 인력시장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남구로역 인근 인력사무소의 한 과장급 직원은 “50대 후반 장년층이 작년 이맘때와 비교하면 10~15% 증가했다”고 말했다.

새벽 인력시장 채우는 고령자들

은퇴 관문에 도달한 베이비붐 세대 상당수가 일용직으로 떠돌고 있다. 이들을 위한 마땅한 일자리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건설현장 잡부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어 은퇴한 5060의 진입장벽이 낮다. 이날 만난 60대 정모씨가 그런 사례다. 금형공장에서 일하다 1년 전부터 남구로역에 ‘출근’하고 있다는 정씨는 “월급 꼬박꼬박 받던 현업 시절이 그립지만 먹고살기 위해 이 일이라도 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나마 다른 일용직에 비해 벌이가 괜찮은 편이다. 벽돌 운반, 철거 등 단순 업무는 별도의 기술 없이도 하루 12시간 기준으로 약 10만~15만원의 일당을 받는다. 공장에서 퇴직한 뒤 두세 달 쉬다가 남구로역을 찾은 A씨는 “이만한 일감을 구하기 쉽지 않다”며 “더 나이가 들어 몸이 받쳐주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에 따르면 올 들어 12월15일까지 50대 이상 아르바이트 구직자는 2016년에 비해 4.84배 늘었다. 같은 기간 전체 알바 구직자 중 50대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도 1.6%에서 2.8%로 증가했다. 50대 이상 구직자의 21.7%는 생산·건설·노무직을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20대 지원자는 불과 8.8%만이 해당 직종에 지원하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준비 못한 5060, 인력시장에 '꾸역꾸역'…"한 달 절반은 공쳐요"
외국인, 고령자의 막노동 경쟁

이미 인력시장이 포화상태라 신규 진입한 베이비부머가 설 자리는 좁다. 중국인 불법체류자 등 외국인 근로자의 일당이 2만~3만원 더 저렴해 건설현장에서 이들에 대한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다.

남구로역 인력시장을 찾는 근로자의 70%가 외국인이다. 통상 남구로역 5번 출구 앞에는 한국인 일용직이, 길 건너 하나은행 앞에는 중국인이 모여 있다. 기자가 찾은 날에도 5번 출구 앞은 비교적 한산한 반면 길 건너 외국인들은 인도를 빽빽이 점거한 것도 모자라 차도에까지 서 있었다. 지나다니는 차량과의 사고 등을 우려해서인지 경찰차 두 대도 인근에서 대기 중이었다.

건설현장 일용직에 종사하던 기존 한국인 근로자들은 울상이다. 장년층과 외국인 등의 유입으로 일자리 수요는 급증했지만 건설경기 불황에 겨울철 비수기가 겹쳐 공급은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11월 임시직·일용직 근로자 수는 전년 동월보다 약 9만5000명 줄었다. 통상 겨울에는 건설현장이 쉬는 경우가 많아 일용직 일자리가 성수기 대비 20~30% 감소한다.

20년간 매일 남구로역으로 출근했다는 70대 김모씨는 “2~3년 전만 해도 한 달에 20~25일 정도 일했는데 요즘은 10~15일밖에 못 한다”며 “오늘도 공치게 생겼다”고 말했다. 말을 마친 김씨는 들고 있던 300원짜리 밀크커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종이컵을 입에 대고 연신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절반 이상은 일감 못 구해

은퇴한 장년층이 인력시장에 몰리는 것은 노년층 빈곤율 상승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45.7%(2017년 말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후 파산도 심각한 수준이다. 2016년 기준 서울중앙지방법원이 파산 선고를 내린 25%가 60대 이상이었다.

이날 어둠을 헤치고 새벽에 남구로역에 출근한 50~60대 절반 이상은 동이 트기 전 발길을 돌렸다. 오전 5시30분을 넘어서면 그날 하루는 공쳤음을 알기 때문이다. 한 60대 남성은 “옛날엔 하루 허탕을 쳐도 내일 일하면 된다는 생각에 술 한잔씩 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럴 마음이 안 생긴다”며 힘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혹시 추가 일자리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로 환경미화원 3명이 바닥에 버려진 종이컵과 담배꽁초를 쓸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은퇴한 중·장년들을 일자리로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연금 인상이나 공공일자리와 같은 재정지출로는 한계가 있다”며 “길거리로 내몰리는 은퇴자가 노후에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직업전환·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등 국가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