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 덤핑공세에…선거 '전화폭탄' 몸살
서울 강남구 주민 김모씨(38)는 22대 총선 선거 운동이 시작된 후 하루 5~6통의 ‘전화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김씨는 “‘02’로 시작하는 번호는 혹시 업무 관련 전화일지 몰라 받고 있는데 번번이 선거 관련 내용이어서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총선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후보들이 쏟아내는 전화·문자 폭탄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유권자가 늘고 있다. 유권자들은 이번 총선에서는 유달리 문자·전화 폭탄이 쏟아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여론조사 난립과 이에 따른 ‘덤핑마케팅’이 전화·문자 메시지 급증 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전화번호만 ‘스팸 신고’ 수만 건

8일 KT그룹사가 운영하는 스팸 차단 앱 후후에 따르면 한 여론조사 업체의 전화번호로 알려진 ‘02-6264-XXXX’ 번호에는 이번 선거운동 기간 3만1000여 건의 스팸 신고가 접수됐다. 한 유력 후보의 투표 독려 전화로 알려진 ‘02-780-XXXX’는 이달 들어 7일까지 스팸대응센터에 2만여 건 신고됐다. 업계 관계자는 “한 번호에 1만 개 이상의 스팸 등록이 이뤄졌다는 건 투표 독려 전화 여론조사 등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라며 “엄밀히 말해 스팸이 아니라 차단 조치를 하진 않지만 개인은 해당 번호를 받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선거 막판이 다가올수록 선거 전화 공세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마지막 한 표라도 얻으려는 후보자들이 횟수 제한이 없는 투표 독려에 열을 올리고 있어서다. 여기에 투표일 당일까지 이어지는 비공개 여론조사도 ‘전화 공해’의 한 요인으로 꼽힌다. 투표일 1주일 전부터는 여론조사를 공표하지 못하지만 후보별, 정당별로 접전지 비공개 여론조사를 하고 있다.

서울 금천구에 사는 직장인 김정원 씨(41)는 지난 6~7일 주말 동안 같은 번호의 여론조사 전화를 13통 받았다. 그는 “조사 결과를 공표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났음에도 똑같은 전화가 오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A정당의 한 당직자는 “공표 기간이 끝났지만, 판세 분석을 위해 지역구, 날짜별로 여론조사를 여러 건 돌리고 있다”며 “선거 막판까지 어디에 유세를 집중할지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투표 독려·여론조사 전화를 받자마자 끊는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꼼수’를 동원하는 후보자도 적지 않다. 서울 지역구의 한 후보자는 투표 독려 전화 멘트를 ‘여보세요’로 한 뒤 약 2초 후 본격적으로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다. 경기도 지역구의 한 후보는 ‘031’ 일반 번호가 스팸으로 신고되자, 선거운동원을 동원해 ‘010’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고 있다. 상황이 이 정도다 보니 통신사별 여론조사 연락을 완전히 차단하는 방법이 온라인에 공유될 정도다. 이 경우에도 후보자의 투표 독려 전화는 막을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론조사 업체 난립에 전화 덤핑 공세

정치권에선 여론조사 업체 난립도 주요 요인으로 보고 있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17년 27개였던 여론조사 업체는 2023년 말 기준 88개로 3배 이상 늘었다. 신생 업체가 싼값으로 패키지 판촉에 나서면서 전화, 문자메시지 덤핑 공세가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 정당 관계자는 “선두권 업체가 단문문자는 1통당 9원, 장문은 24원을 받는데 후발업체는 단문 6~8원, 장문은 18원까지 낮춰서 제안하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무분별한 선거 홍보전이 ‘공해’로까지 여겨지는 만큼 최소한의 규율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어떤 유권자에겐 선거보다 편안한 삶을 살 권리가 중요할 수 있다”며 “무분별한 홍보행위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철오/안정훈 기자 che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