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닌 후배들이 이런 곳에서 뛰어야 하는데…더 치고 나오길"
필리핀 평가전 완승에도 '담담'…"웃을 때 아냐…후배들 정신 차렸으면"
여자축구 '최고' 미국 무대 누비는 지소연 "왜 이제 갔나 싶어"
"깜짝 놀랐어요.

내가 이런 무대에 왜 이제야 왔을까 싶더라고요.

"
유럽에서만 8년, 일본을 포함하면 해외 리그에서 보낸 세월이 10년이 넘는 여자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 지소연(33·시애틀 레인)에게도 세계 최강 미국은 '신세계'인 모양이다.

2011년 일본 아이낙 고베에서 프로 데뷔한 지소연은 2014년부터 2022년까지는 잉글랜드 첼시 위민에서 뛰며 리그 6회,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 4회, 리그컵 2회, 커뮤니티 실드 1회 우승에 앞장섰다.

첼시에서 2021-2022시즌을 마친 뒤 수원FC 유니폼을 입고 WK리그에서 뛴 그는 올해 1월 시애틀 레인과 계약하며 미국여자프로축구(NWSL)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필리핀과의 국가대표 평가전이 열린 5일 이천종합운동장에서 만난 지소연은 미국 생활에 대해 "무척 재미있다.

몸은 힘들지만, 여자 축구 선진국이자 최고의 무대에서 뛸 수 있다는 게 매우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리그엔 한 나라의 국가대표가 아니어도 뛰어난 여자 선수가 많더라. 실력을 보면 당연히 국가대표를 할 만한 거로 보이는데도, 좋은 선수가 워낙 많다 보니 그런 선수들도 국가대표로 못 뛰는 정도"라며 혀를 내둘렀다.

여자축구 '최고' 미국 무대 누비는 지소연 "왜 이제 갔나 싶어"
그러면서 지소연은 "제가 아닌 다른 (한국) 선수들도 좀 와서 뛰어야 하는데, 아무도 오질 못하니 저 혼자 이런 것을 느끼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털어놨다.

지소연이 첼시에서 활약한 이후 한국 여자 선수들의 유럽 진출 사례가 늘고는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는 WK리그에서 뛰고 있다.

지소연은 "대표팀에서 20년이 다 되어간다.

제가 '고인 물'이고 빨리 나가야 한다는 걸 저도 안다"면서 "'이만하면 됐다' 싶을 정도로 후배들이 치고 올라와 줘야 마음 편히 나갈 텐데 착잡하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제 대표팀에서 제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아 후배들에게 더 강하게 한다"고 귀띔한 지소연은 필리핀과의 평가전 3-0으로 완승에 대해서도 담담했다.

대표팀은 이달 A매치 기간 마련된 필리핀과의 2연전 중 첫 경기에서 전반 고전하다가 후반에 최유리(버밍엄 시티), 지소연, 장슬기(경주 한수원)의 연속 골로 이겼다.

여자축구 '최고' 미국 무대 누비는 지소연 "왜 이제 갔나 싶어"
지소연은 "더 좋은 경기력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너무 정신 없이 뭐 하는지도 모르겠고 너무 화가 나더라. 이런 경기를 하면서 선수들이 웃는 것도 저는 기분이 좀 좋지 않았다.

웃을 때가 아닌데…"라며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먼 것 같다.

정신을 좀 차렸으면 좋겠다"고 일침을 놨다.

여자 축구 대표팀은 지난해 호주·뉴질랜드 여자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탈락했고,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선 8강에서 북한에 덜미를 잡혔다.

파리 올림픽 아시아 2차 예선에서도 4강 토너먼트에 오르지 못해 본선 진출에 실패, 당분간 큰 대회 없이 올해 들어선 친선경기를 치르고 있다.

"콜린 벨 감독님 선임 이후 예전보다 A매치도 꾸준히 하고 있는데도 경기력이 아직 이러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한 지소연은 "미국에 가서 보니 격차가 더 보여서 어떻게 줄여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축구 '최고' 미국 무대 누비는 지소연 "왜 이제 갔나 싶어"
필리핀과의 1차전에서 후반 31분 프리킥으로 추가 골을 터뜨린 지소연은 자신이 보유한 한국 선수 역대 최다 득점 1위 기록을 71골로 늘렸다.

이 중 프리킥으로 7골을 넣은 그는 남자 대표팀 손흥민(토트넘)의 6골을 넘는 한국 선수 A매치 최다 프리킥 득점 신기록도 세웠다.

페널티 지역 왼쪽 바로 바깥에서 뚝 떨어지는 절묘한 궤적의 오른발 프리킥을 꽂은 지소연은 "프리킥은 항상 자신 있게 차는 편이다.

기회가 좋아서 분위기를 가져오려 집중해서 찼다"며 "노리고 찬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그 정도로 사이드에서 차 넣은 건 처음인 것 같다"고 되짚은 그는 "제가 노리기보단 다른 선수들에게 맞춰주려고 했는데 이번엔 욕심을 조금 부려봤다.

애들이 못 넣어서 그렇게 차는 게 나을 것 같다"며 에둘러 후배들의 분발을 재차 촉구했다.

그는 "베테랑들이 한 번에 대표팀에서 다 떠날 수는 없고, 어느 정도 버텨주며 융화를 이룬 뒤 어린 선수들의 성장을 돕고 물러나 주는 게 맞는 것 같다"면서 "선수들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