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ESG NOW
미국 석유기업 엑슨모빌은 행동주의 투자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ESG 투자 세력과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 석유기업 엑슨모빌은 행동주의 투자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ESG 투자 세력과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에서 연기금과 금융사들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에 대한 법률적·정치적 역풍이 거세지고 있다. 일부 기업이 친환경 원칙 때문에 사업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반발하고 있다. 최근 소송을 제기한 엑손모빌은 기후 행동주의가 주주 가치 제고를 명분으로 기업의 미래까지 망치려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 정치권은 국익과 에너지 안보 등을 빌미로 친환경 에너지전환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미국 법원의 판단 결과에 따라 향후 ESG 투자 환경이 급변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유럽 각국은 변함없이 친환경 투자 기조를 지속하는 가운데 ESG 투자를 실행하는 방법에 일부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스코프 3 도입 거부한 엑손모빌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기사에서 엑손모빌이 벌이고 있는 ‘ESG 전쟁’을 집중 조명했다. 기후변화 방지 정책을 요구한 행동주의 투자자를 상대로 지난 1월 소송을 제기한 미국 석유기업 엑손모빌은 이들이 안건을 자진 철회했음에도 소송을 계속하고 있다. ‘소액주주의 입을 막는 괴롭힘 전략’이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법원의 판단을 받겠다는 입장이다.

엑손모빌은 “이번 주주제안은 기업의 수익을 개선하거나 주주 가치를 높이려는 게 아니라 영업을 위축시키고 세세하게 간섭하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석유 판매가 본업인 엑손모빌이 소비자의 탄소배출까지 통제해야 하는 ‘스코프 3’를 도입하는 것은 사실상 영업 포기와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찰스 크레인 전미제조업자협회(NAM) 부회장은 FT에 “많은 대기업이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행동주의 펀드뿐 아니라 연기금, 자산운용사 등 금융권에서도 ESG 투자와 관련한 법적 리스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ESG 압박으로 기업이 손실을 낼 경우 다른 주주로부터 소송을 당할 수 있어서다. 친환경 전략으로 인한 손실액을 특정하기는 쉽지만, 거꾸로 기후변화 방지 등의 노력이 기업 이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증명하기는 어렵다는 점이 고민거리다.

금융사들이 공동으로 ESG 투자 기준을 적용할 경우 미국에서는 반독점 소송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자산운용사, 보험사, 연기금 등 300여 개 회원사를 둔 ‘넷제로 자산운용 이니셔티브’는 최근 웹사이트에 “적용되는 모든 법률과 규정을 준수할 것을 약속한다”는 면책 조항을 게시했다. HSBC, JP모건 등 대출 기관 연합인 ‘넷제로 뱅킹 얼라이언스’ 역시 반독과점 소송에 대비해 정관에서 ‘집단적이고 일치된 진전을 추진할 것’이라는 문구를 삭제했다.

법률 리스크 커지는 ESG 투자

대형 자산운용사인 JP모건(자산운용 사업부)과 스테이트스트리트 글로벌어드바이저스는 기후 대응 투자자 그룹인 ‘기후 행동100+’(Climate Action 100+)에서 최근 탈퇴했다. 항공·정유사 등 온실가스배출량이 많은 기업에 친환경 에너지전환 노력을 촉구하기 위한 기구다. 스테이트스트리트 관계자는 뉴욕타임스(NYT)에 “기후 행동100+는 (피투자회사에 대한) 지나친 간섭을 요구한다”며 “대리 의결권 행사 등과 관련한 자체 원칙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블랙록 역시 해외 부문만 기후 행동100+ 회원 자격을 유지하기로 했다. 블랙록은 기업을 직접 압박하는 것은 미국 법의 ‘운용사는 고객의 장기 수익만을 고려해 행동해야 한다’는 규정과 상충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 블랙록은 “고객의 자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특정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관리하는 돈은 그 사람들의 것이 아니며, 우리(블랙록)의 것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금융투자 기업들이 한 발 물러선 것은 미 공화당의 ESG에 대한 강한 거부감 때문이다. 오는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에선 ESG 투자에 대한 정치적 공세가 거세지고 있다. 공화당 측은 물가안정과 에너지 안보에 필수적인 미국의 석유자원 개발에 ESG가 걸림돌이라고 비판한다.

텍사스와 인디애나 등 미국 18개 주는 이미 주정부와 산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의 투자에 ESG 요건을 고려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중 플로리다 등 일부 주는 ESG를 금융사의 대출 심사 기준으로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등 광범위한 반ESG 법률을 제정했다. 뉴햄프셔주 의회에선 지난 1월 ESG 투자 원칙을 국고, 퇴직금 등 정부 기금 투자에 의도적으로 포함시킬 경우 형사처벌하는 법률안이 제출됐으나 부결됐다. 법안의 취지는 정부 기금 투자에 ESG 투자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이념적 목적으로 국익과 납세자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와 동일시하겠다는 뜻이다.

선제적으로 ESG 투자 원칙을 내세운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정치적 비난에 시달린 끝에 “더 이상 ESG라는 용어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부 보수 강경파는 ESG 투자에 독선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함을 비꼬는 ‘깨어 있는(woke)’이라는 단어를 붙여 ‘깨어 있는 자본주의’라고 지칭하며 비판한다.

친환경 기조 지키는 EU

ESG 투자에 대한 역풍은 저조한 투자 성과 때문이기도 하다. 유동성이 넘치던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그렸던 장밋빛 청사진은 2022년부터 급등한 금리 때문에 현실화되지 못했다. 수익성이 낮아진 태양광·풍력 프로젝트는 잇따라 좌초됐다. 반면 엑손모빌, BP, 셰브론, 쉘, 토탈에너지스 등 글로벌 5대 ‘석유 공룡’은 2022년 1960억 달러(약 261조6000억원)의 전무후무한 순이익을 기록해 반ESG 투자자에게 큰 수익을 안겨줬다. 작년에도 총 1230억 달러(약 163조1000억원)가량의 순이익을 낸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유럽에선 그럼에도 아직 ESG 투자에 대한 열기가 식지 않았다. 악사와 BNP 파리바 등 유럽 금융 그룹은 새로운 화석연료 프로젝트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유럽증권시장국(ESMA)은 ESG 펀드로 돈을 모아 엉뚱한 곳에 투자하는 이른바 ‘그린워싱’ 단속 강화를 추진하는 등 친환경 기조를 더욱 강화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다만 ESG 투자 관행에 일부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지속가능성과 더 높은 운용수익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더 정량적 분석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자산운용사 PGIM의 데이비드 헌트 최고경영자(CEO)는 FT에 “ESG에 대한 입증 가능한 스토리를 갖고 목표한 일을 실제로 수행한다는 것을 정량적으로 입증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현일 한국경제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