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세상을 떠난 임성기 한미약품 창업주는 유족은 물론 회사에도 무거운 숙제를 남겼다. 후계 구도를 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창업주의 갑작스러운 별세에 국내 1위 연구개발(R&D) 제약사인 한미약품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자녀 2남1녀 중 그 누구도 경영권을 확실하게 틀어쥐지 못하는 상황이 3년 넘게 지속됐고, 다른 회사를 압도하던 신약 개발과 제약영업 주도권을 경쟁사에 하나씩 내주기 시작했다.

회사 경영엔 손도 대지 않던 창업주의 부인(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이 수장에 올랐지만 “경영권이 확실하게 교통정리되지 않는 한 한미약품은 매물로 나올 것”이란 추측은 끊이지 않았다. 5000억원이 넘는 상속세 납부 부담도 이런 소문에 힘을 보탰다.

이런 상황에서 송영숙 회장이 내놓은 해법은 임주현 한미약품 사장을 제약·바이오 부문 대표로 하는 OCI와의 합병이었다. 공동경영을 통해 제약·바이오 부문의 경영권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동시에 넉넉한 신약 개발 자금도 확보하는 ‘일석이조’ 효과를 노린 것이다. 국내 5위권 제약사를 품게 된 OCI도 확실한 미래 성장동력을 갖추게 됐다는 점에서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라는 분석이다.
한미약품, 신약개발 자금 마련 숨통…OCI는 '바이오 날개'

이우현·임주현 ‘쌍두마차’ 체제로

12일 두 회사의 통합으로 OCI홀딩스가 확보하게 되는 한미사이언스 지분은 27%다. 구주와 현물 출자로 18.6%, 신주 발행으로 8.4%를 7703억원에 확보하게 된다. 구주는 대부분 송 회장과 임 사장이 보유한 지분으로 알려졌다.

송 회장은 한미사이언스 지분 11.7%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임 사장 지분율은 10.2%다. 이번 거래 후 송 회장의 한미사이언스 지분율은 2%대로 낮아진다. 송 회장은 OCI홀딩스에 매각한 주식대금을 2000억원에 이르는 상속세를 내는 데 쓸 것으로 알려졌다.

임 사장은 한미사이언스 주식을 전량 매각한 돈으로 OCI홀딩스 지분을 10.4% 확보했다. 개인 자격으로는 OCI홀딩스 최대 주주다. 이우현 OCI홀딩스 회장 개인 지분율은 6.6%에 그치지만 특수관계인을 합치면 28.7%에 달한다.

향후 설립할 통합법인은 이 회장과 임 사장이 각자대표 형태로 이끈다. 지금처럼 이 회장이 첨단소재와 신재생에너지를, 임 사장이 제약·바이오 사업을 맡는다. 두 사람은 통합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다양한 신사업에도 적극 뛰어들기로 했다.

신약 개발·성장 동력 ‘윈윈’

한미약품 입장에선 OCI와의 통합은 ‘신의 한 수’다. 막대한 신약 개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서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30여 개의 파이프라인(신약 개발 후보)을 보유하고 있는 한미약품은 매년 1500억원 안팎을 신약 개발에 투입하고 있다. 한미약품의 현금성 자산이 1881억원(2023년 9월 말 기준)가량인 걸 감안하면 빠듯한 수준이다. ‘현금부자’ OCI홀딩스와의 통합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작년 9월 말 기준 이 회사의 현금성 자산은 1조705억원에 달한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든든한 뒷배가 생긴 만큼 신약 개발에 탄력이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번 ‘결혼’이 한미약품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제약·바이오를 미래 먹거리로 삼은 OCI 입장에선 넓고 깊은 파이프라인을 갖춘 한미약품만큼 매력적인 배우자가 없다. 2018년 제약·바이오 사업에 진출한 OCI는 차세대 암 진단과 항암 치료 파이프라인을 보유한 유망 바이오벤처기업을 중심으로 투자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2022년엔 뇌질환(중추신경계) 치료제와 항암제 등을 개발하는 부광약품 최대주주에 올랐지만 성에 차지는 않았다.

OCI가 제약·바이오에 눈독을 들이는 건 신재생에너지 및 소재사업만으론 미래를 준비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폴리실리콘 생산 자회사 OCIM이 중국 기업들의 공세로 2018년과 2019년 적자를 낸 악몽이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OCI홀딩스 관계자는 “한미약품과 함께 세계에서 먹힐 신약을 개발할 것”이라며 “두 회사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신사업에도 뛰어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우섭/이지현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