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트 프레시센터에서 작업자가 단호박을 포장하고 있다.(사진=이마트 제공)
이마트 프레시센터에서 작업자가 단호박을 포장하고 있다.(사진=이마트 제공)
농산물 유통시장에서 ‘직거래’가 대세로 굳어지고 있다. 중간에 도매시장 중도매인이 끼는 농산물 유통의 전통적 프로세스가 산지에서 곧장 일선 마트나 e커머스로 연결되는 형태로 확 바뀌는 추세다.

농산물은 인플레이션, 산지 초고령화, 이상기후 등의 악재가 겹겹이 쌓여 생산 단계에서 고비용 구조가 만성화할 조짐을 보인다. 직거래 역량을 키워 유통 과정에서 가격거품을 빼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게 유통업계의 시각이다.

대형 유통업체 직거래 비중 80% 넘겨

11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생산자(농민) 단체인 지역 농협이 대형 유통업체에 농산물을 직접 판매한 비율은 2003년 10.4%에서 2021년 39.6%로 상승했다. 같은 기간 도매법인에 파는 비중은 77.3%에서 43.7%로 쪼그라들었다.
농협의 거래선 변화(단위:%)(자료=aT)
농협의 거래선 변화(단위:%)(자료=aT)
주요 마트와 e커머스로 범위를 좁혀보면, 직거래 비중은 80%를 넘어섰다. 한국경제신문이 주요 업체 5곳(이마트·롯데마트·홈플러스·컬리·SSG닷컴)의 신선식품 산지 직거래 비중을 분석한 결과 평균치는 2020년 76.5%에서 지난해 81.7%로 뛰었다.

농산물 직거래는 원래 소비자가 산지에서 직접 구매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런 거래 방식은 극히 드물다. 이에 따라 농촌경제연구원 등 연구기관과 업계는 유통업체가 도매시장 중도매인을 거치지 않고 산지에서 직접 소싱하는 것도 직거래로 간주한다.

농산물 직거래가 확산한 데엔 코로나 사태를 기점으로 온라인 유통이 대세가 된 게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컬리, 쿠팡 등 e커머스들이 신선식품 분야에서 대형마트와 경쟁하기 위해 산지 발굴과 빠른 배송에 적극적으로 나선 게 온오프라인 업체 간 경쟁을 촉발했다.

대형마트 또한 물류를 업그레이드해 e커머스의 공세에 맞서고 있다. 산지에서 농산물을 직접 매입해 선별·포장센터로 들여오는 이마트가 대표적이다. 양석준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신선식품 시장에서 도매시장과 중도매인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하고 있다”며 “지금은 유통사가 농민들과 협업해 상품을 기획·생산하는 소비자 중심의 시대”라고 말했다.

유통업체 “생존을 위한 직거래”

중부지방에 내린 극심한 폭우로 농산물 가격이 급등했던 지난달 말, 이마트는 단호박을 40% 이상 파격 할인해 개당 1980원에 파는 행사를 펼쳤다. 이 기간에 단호박은 전남 함평 등 주산지에서 출하량이 급감해 전국 주요 도매시장에서 전주보다 10% 이상 비싼 1만6808원(10㎏)에 거래됐다.

이는 이상기후로 출하가 불안정해지는 일이 매년 반복되자 바이어가 직거래 농가들과 사전에 협의해 수확 시기를 앞당긴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마트는 폭우가 오기 전 프레시센터(신선식품 저장창고)에 단호박을 대거 비축했다가 가격이 오르는 시기에 저렴하게 풀 수 있었다. 이런 대응은 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직격하기 전에도 비슷했다.

11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대형 유통업체들은 20년 전인 2003년만 하더라도 판매 농산물의 68.4%를 도매시장에서 구입했다. 이 비중이 2015년엔 27.6%, 2021년엔 22.9%로 떨어졌다.

대형마트의 전성기였던 2000년대부터 농산물 마진 확대를 위해 직거래 비중을 늘리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2000년대부터 2010년대 후반 무렵까지는 그 목적이 유통 비용 절감, 지역 상생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고 품질의 농산물을 날씨 등 환경변화에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공급 받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2020년 코로나19 창궐 후 온라인 쇼핑이 활성화하자 대형마트가 장악하고 있던 신선식품 시장에 e커머스가 치고 들어오면서 경쟁이 격화했다.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 하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됐는 얘기다. 이마트의 경우 지난해를 기점으로 농산물 확보 프로세스를 산지→프레시센터→점포로 단순화하는 작업에 힘을 싣고 있다.
자료=이마트
자료=이마트
프레시센터를 통하는 농산물의 비중은 2018년 26%에서 지난해 38%로 확대됐다. 김동현 이마트 채소팀장은 “프레시센터에서 선별·포장 등 원물을 상품화하는 전 과정을 수행하는 만큼 산지 초고령화에 따른 일손 부족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며 “기후 변화, 물가 상승 등으로 농산물 생산 고비용 구조가 만성화해 직거래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유통사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가속하는 ‘脫도매’

산지→지역 농협 및 영농법인→도매시장(중도매인)→유통업체→소비자로 이어졌던 농산물 유통시장의 전통적 구조를 대형마트보다 먼저 깨고 나선 건 e커머스다. 기존 강자인 마트와 경쟁하기 위해선 더 신선한 상품, 더 빠른 배송이 필수라고 보고 창업 초기인 2010년대 초·중반부터 우수 산지 발굴에 올인했다.

쿠팡의 경우 산지와 최대한 가까운 곳에 물류센터를 짓고 인근에서 직매입한 신선식품의 재고를 직접 관리한다. 전국에 촘촘히 깔린 100개 이상의 물류센터를 기반으로 냉장고가 탑재되지 않은 트럭으로도 신선식품을 배송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e커머스 업계 관계자는 “여전히 신선식품을 오프라인 채널로 구매하기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많은 만큼 소비자들에게 산지와 판매자에 대한 신뢰를 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e커머스가 신선식품 출하→보관→배송까지 모두 관리하는 직매입으로 차별화하려는 이유”라고 말했다.
쿠팡물류센터(자료=쿠팡)
쿠팡물류센터(자료=쿠팡)
농산물 생산비용이 구조적으로 증가하는 환경이 조성된 것도 유통사들이 직거래로 비용을 줄이는 데 주력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매년 폭염, 폭설, 폭우 등 변덕스러운 날씨가 이어지면서 도매시장에서 농산물 가격은 해마다 고공행진 중이다.

이런 와중에 산지 초고령화로 인해 전국의 경지면적은 10년(2012~2021년) 새 172만9982㏊에서 152만8237㏊로 11.6% 줄었다. 최근 1~2년 사이에는 인플레이션의 여파로 비료 가격, 냉·난방 비용, 인건비 등의 부담도 가중했다.

김병률 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유통 과정을 한 단계라도 줄여야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며 “온라인 플랫폼과 대형 유통업체 중심으로 시장의 판도가 변하는 상황에서 도매시장도 변화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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